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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다른 일을 못하네요. 언능 읽어야겠어요. 다 읽으면 속이 후련해질는지. 지금은 속에 천불이 나거덩요. 쬐끔씩이라도 공부하면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제게도 생길까요. ㅠㅠ”

오랜 결혼생활을 하다 뒤늦게 공부하러 나온 대학원 여제자. 요번에 내가 출간한 사회학 소설을 읽다가 열불이 나는지 문자를 보내왔다. 대구·경북 여성의 삶. 낳아 키워준 지향 가족 안에서 살다가 결혼하여 자신의 생식 가족을 구성해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 결혼은 남편과 했지만, 결혼생활은 시어머니와 하며 살아간다. 남편이 아직 어머니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미성숙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남편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재생산 활동에 몽땅 쏟아붓는다. 자신의 꿈이나 이해관계를 단 한 번도 대놓고 말하거나 앞세우지 못하고 가족의 유대를 위해 뒤로 꼭꼭 숨긴다. 개인의 자아가 가족 자아로부터 분화하지 못했다. 뒤늦게 집을 벗어나 공부하러 나왔는데, ‘밥데렐라’처럼 때만 되면 밥상 차리러 황급히 집으로 되돌아간다.

얼마 전 또 다른 여제자가 보낸 문자를 다시 열어보았다. “교수님, 6일과 13일에 집안에 제사가 있어 수업 참석이 어렵습니다. 다음 학기 때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봉제사(奉祭祀)!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씁쓸한 마음을 접고 답을 보냈다. “암요. 앎의 의지로 세상이 다르게 보이니까요.”

‘니내살’(<니는 내맹쿠로 살지 마래이>)과 다르게 보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문득 요즘 한창 화젯거리인 ‘스우파’(스트리트 우먼 파이터)가 떠올랐다. 언뜻 흔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른 게 보인다. 아이키, 가비, 허니제이, 리헤이, 모니카, 리정 등 이름에 가부장제의 흔적조차 없다. 여성이 재생산 활동과 돌봄 노동에서 벗어나자 자기 몸을 가지고 마구 논다. 각자 독특한 춤 스타일로 탁월성을 겨룬다. 무엇보다도 ‘여성스러운 공격성’(feminine aggressivity)이라는 모순어법이 두드러진다. 여성스럽다는 것은 보통 ‘수세적인’ 법인데, 남성스러운 속성인 공격성과 결합했다. 성기 중심의 남성적 에로티시즘에서 벗어난 여성적 에로티시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온몸에 골고루 퍼져 있는 에로티시즘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활짝 열려 있다.

하지만 극도로 성기 중심의 이성애 사회는 여성적 에로티시즘을 바라볼 문화적 역량이 없다. 우승팀 홀리뱅의 수장인 허니제이가 말한다. “처음에 저도 핫팬츠에 브라톱 입고 이러고 막 공연하고 내려왔는데 댄서 오빠들이 ‘야 섹시 댄스 잘 봤다’. 이러면서 저한테도 그랬던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그런 거는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춤추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면 자부심을 가지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돼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질 리포베츠키가 말한 나르시시즘적 개인주의가 떠오른다. 가부장적 타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지위 경합이나 구별짓기를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준거가 되어 자기 환상적 쾌락을 즐긴다. 진짜 배우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일의 관객으로 둔다는 말이다.

더는 여성을 가부장적 가족 안에 가두어 놓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가족 밖에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 신여성이 겪은 불행은 가족 밖을 나가도 진출할 영역이 없어 벌어졌다. 거의 100년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여성이 진출할 영역이 돌봄 노동 시장 이외 딱히 없는 참혹한 현실. 여성을 사물이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악한 제도로 시장을 정의해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도덕 담론도 가부장제 악습 못지않은 큰 책임이 있다. 스우파는 여성이 이중의 악을 뚫고 집 밖에 나가 시장에서 독자적인 가치영역을 창출한 놀라운 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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