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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숨]2021년의 옆집 어린이

opinionX 2020. 12. 28. 09:46

2020년의 연말을 보내고 있는데 한 세기의 끝 같은 느낌이 든다. 무엇부터 돌아봐야 할까. 1999년의 연말은 어땠는지 떠올려본다. 21세기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여러 가지 예견의 말이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지금은 고요한 목격자의 마음으로 연말을 맞는다. 모호하게 짐작되던 것은 현실로 눈앞에 있다.

20세기 말에 편집된 20년 전 잡지, 계간 ‘시와 동화’ 10호를 찾아 읽었다. 돌아가신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동화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1999년 10월27일에 써서 보내온 편지가 들어있었다. 첫 문장은 평범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의미심장하게도 “올여름은 참 더웠지요”로 시작하는데 “살아갈수록 왜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지 속이 상합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한참 머물렀다. 혼돈의 2020년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이다. 창작의 고뇌를 담은 조심스러운 편지 끝에 선생님은 “목숨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쓰면 다른 어떤 기교나 재주는 별문제가 없다고 봅니다”라고 조언하면서 “아동문학은 이렇게 목숨에 대한 애정을 찾아 써 놓은 사랑의 문학인 것입니다”라고 끝맺는다. 목숨에 대한 애정, 올해 가장 많이 놓쳤던 일이다.

여기서 100년쯤 훌쩍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평생 212편의 동화를 남긴 안데르센은 19세기 사람이다. 그는 거의 10년마다, 강박적일 정도로 새 자서전을 썼는데 첫 번째 자서전을 쓴 것은 27세 때다. 왜 그토록 일찍 뒤를 돌아다봐야 했을까. 덴마크 변방에서 온 가난한 젊은이 안데르센은 성공한 작가가 되어 낭만주의 시대 유럽의 군주들을 만나고 그 화려함과 어마어마한 간극에 몸을 떤다. 자신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무엇인가 계속 적어두어야 했을 것이다. 모멸감 속에서도 그는 “내가 살아온 인생이 바로 내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이다”라고 굳은 다짐을 거듭한다. 숨을 거두던 날 안데르센은 첫사랑 리보르가 준 편지를 가죽 주머니에 담아 목에 걸고 있었다. 권정생 작가가 어린이와 생명에 대한 결의를 끝까지 지켰다면 안데르센은 자기 자신과 첫사랑에 대해 마지막까지 충성했던 사람이다. 코펜하겐의 뉘하운 18번지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는데 40년 전 그가 첫 번째 동화를 썼던 집이 바로 옆의 옆 골목, 뉘하운 20번지였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 올해 가장 많이 바랐던 일이다.

돌아볼 것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2020년을 마치며 200년쯤을 훌쩍 거슬러 다녀온 이유는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올해의 말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2020년의 말은 ‘옆집의 어린이’다. 누구에게나 옆집이 있고 아마도 어린이가 살고 있을 테고 그 어린이는 살아있다. 옆집의 어린이는 격리 없이 멀리 갈 수 있어야 하고, 멀리까지 살아야 한다. n번방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옆집의 어린이가 있다는 현실을, 돌봄 공백 속에 집에 갇힌 옆집 어린이의 안부를, 내가 버리는 쓰레기더미를 안고 살아가야 할 그들의 앞날을 기억해야 한다. 그 어린이들은 귀 기울이고 고발하고 구조에 나서고 행동하는 옆집의 어른을 기다리고 있다.

성동혁 시인은 2020년 ‘창비어린이’ 겨울호에 실린 동시 ‘퇴원’에서 “많은 것이 떠났어/ 창밖 가을도 며칠 전에 떠났어/ 사람들이 코트를 입고 들어와/ 나도 길고 무거운 코트를 입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이 동시의 화자는 난치병으로 장기입원 중인 어린이다. 시인 본인도 소아 난치병 환자로 병동에서 긴 시간을 보냈으며 아직도 투병 중이다. 그는 어린이 병동에서 만난 옆 침대의 어린이를 위해 동시를 쓴다. 시를 읽으면서 옆집의 어린이가 길고 무거운 코트를 입는 어른이 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들에게 코트를 선물하고 싶다. 그러려면 옆집의 어른들이 달라져야 한다. ‘목숨에 대한 애정’을 되찾아야 한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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