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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민주주의의 곡성(哭聲)처럼 들리는 이 대사를 요즘 반민주적인 집권세력에 쏟아붓고 싶다. 집권 여당이 개혁 입법의 취지라고 내세우는 것처럼 악의적 허위보도나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의 보호가 중요한가, 아니면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될 언론자유가 더 중한가?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 보호와 ‘언론자유’ 모두 중요하다는 말은 문제의 심각성을 흐릴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가지를 똑같이 다루는 것이 마치 공평하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한 제도로 만들려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국민의 권익 보호는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고 과제다. 허위보도와 가짜뉴스로 국민이 피해를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국가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도 물론 당연하다. 이 경우에도 권익 보호는 민주적 절차와 규범을 따라야 한다. 무엇이 피해이고, 어느 정도까지 보호해야 하고,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관한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국민의 권익이고 어떻게 이 권익을 보호할 것인가를 정하는 제도가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모든 권익 보호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둥이고 국민의 알권리와 함께 특별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만큼은 지극히 옳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관한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가짜뉴스와 언론자유, 무엇이 더 중한가? 민주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는 논의 과정을 지켜보면, 개정안의 진짜 목표가 실제 일반 국민의 권익 보호에 있지 않다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유튜브 방송이나 SNS에 대한 정교한 접근은 보이지 않고, 공익을 추구하는 신문과 방송을 집중적으로 겨냥하여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경향이 너무나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언론개혁은 언론을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 권력을 견제하도록 하는 것인데, 특정 당파의 정치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의 힘을 빼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치와 언론이 다루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여론이다
가짜뉴스 등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언론자유를 권익보호에 우선해야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 사태를 꿰뚫어 보려면, 우리는 정치와 언론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가짜뉴스(fake news)’라는 용어의 탄생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가짜뉴스는 거짓언론과 허위보도로 발생한 피해자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독재 성향의 권력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한 ‘페이크 뉴스’라는 낱말은 독일어 ‘뤼겐프레세’를 옮긴 것이다. 거짓언론 또는 허위언론으로 옮길 수 있는 이 낱말은 독일 나치 정권 때 비판자를 중상하고 비방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정치적 경쟁자나 비판자를 경멸하고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가짜뉴스’라는 용어는 언론자유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용어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적의 선전 선동을 깎아내리기 위해 주조된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나치 정권이다. 히틀러는 유대인, 공산주의자와 외국 언론을 ‘페이크 뉴스’라고 매도하였으며, 제국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시킨 헤르만 괴링은 1933년 연설에서 유대인 상점에 대한 공격과 유대인 회당을 훼손한 일을 부정하면서 ‘페이크 뉴스’라는 낱말을 사용하였다. 권력 유지와 확대를 위해 비판적 목소리를 죽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바로 ‘가짜뉴스’라는 낱말이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아는 독일인들이 이 용어를 금기어처럼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권력 집단에도 비판자와 견제자는 껄끄럽다. 정치적 상대가 제거되고 청산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집권세력이 될 수 있는 ‘경쟁자’로 보는 것이 민주주의다. 비판자를 적으로 보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태로워진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고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민의 이름으로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독재가 탄생한다. 독재자는 항상 법과 선거 시스템, 그리고 다양한 제도를 바꿈으로써 저항 세력을 약화한다. 독재자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국민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날처럼 여론 조작이 쉬운 현실에서 국민의 알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위해 필요한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에 가짜뉴스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는 권익 보호보다 우선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어느 쪽도 아닌 것으로 끝날 것이다. 평등보다 자유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두 가지 모두 높은 수준을 얻을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언론자유를 권익 보호보다 우선시하는 사회는 언론의 자유도 보장하면서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 보호도 높은 수준으로 할 수 있지만, 권익 보호라는 명분으로 언론자유를 위축시키면 둘 다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민주를 그렇게 외치는 집권세력이 왜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물려 하는 것일까? 단지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보호하거나, 혹자가 의심하는 것처럼 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의도에서인가? 속셈을 알 길이 없지만, 그 원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운동권 마인드를 떨쳐버리지 못한 집권세력의 정치적 불치병처럼 보이는 ‘독선주의’가 시대착오적 무리수의 원인이다. 그들은 피해받는 국민을 보호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개혁이라는 목적이 항상 개혁의 수단에 우선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맥락에서 그들은 항상 다수의 권력을 합리적 절차에 앞세운다. 대화와 타협을 배반과 타락으로 생각하는 그들이기에 같은 당 소속 국회의장에게 모독적인 쌍욕을 해대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선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어느 개인도, 집단도, 정당도 진리를 독점하지 않는다. 다원성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 민주주의의 가능 조건이다. 다원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 또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는지 의문이다. 아니면, 양 진영으로 적대적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타락한 정치문화가 정치에 발을 들이는 모든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인가? 독선과 독재,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좋은 정부의 나쁜 토대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보인다.

독선과 독재를 견제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고 언론이다. 이 점에서 정치와 언론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상보적이다. 건강한 언론이 없으면 좋은 정치가 있을 수 없으며, 다원성을 보장하는 건강한 정치가 없다면 좋은 언론이 존재할 수 없다. 가짜뉴스가 부정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보면 정치와 언론이 모두 진리나 진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해나 아렌트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정치와 진리는 사이가 좋지 않다.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라”라는 라틴어 경구를 따라 진리를 추구하는 정치는 언제나 독재와 전체주의로 끝났다.

정치와 언론은 진리가 아니라 여론을 다룬다. 복수의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적 현실에서 다양한 의견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다. 사실은 항상 관점과 해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물론 거짓말, 허위정보, 가짜뉴스가 생겨날 수 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비록 상대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말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언론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짜뉴스 피해자 보호를 위한 방법을 숙의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짜뉴스와 언론자유, 무엇이 중한가?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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