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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바다에 홀로 서서 마지막 기도처럼 어머니를 부르면 나도 어머니가 된다, 세월과 함께 깊어가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그저 출렁이고 또 출렁이는 것밖엔 달리 할 말이 없는 파도치는 가슴의 어머니가 된다.
바다에 나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지금껏 나만을 생각했던 일을 바다에게 그만 들켜버린 것 같아 매우 부끄럽다. 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한 마디의 기도라도 남을 위해 바치고 싶다. 내가 할 일도 조금씩 줄이면서 좁은 마음을 넓은 마음으로 바꾸어오고 싶다.
내가 사랑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이 받아서 더 무거운 살아있음의 무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랑의 무게, 이 무게를 바다에 내려놓고 오늘은 남빛 옷을 걸치고 있는, 끝없는 수평선 위에 내 마음을 눕힌다.
바다! 영원을 향한 그리움은 처음부터 그에게 배웠다. 그는 무작정 나를 기다려주는데 어느 때나 열려 있는 푸른 문인데 나는 왜 종종 그가 두려울까.
내가 저녁기도를 바치면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시편을 읊는 바다. 더 낮아지라고 한다. 더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겸손의 해초가 자라는 물 밑으로 더 깊이 내려가라고 한다.
저녁노을 가슴에 안고 온몸으로 하프를 켜는 바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춤을 추네. 물 위에 앉아 잠시 뜨거운 그리움 식히다가 다시 일어서서 춤을 추는 새가 되네.
해질녘의 바다에 서면 나는 섬이 되고 싶어, ‘함께’이면서도 ‘홀로’일 줄 아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고독하면서도 행복한 하나의 섬으로 솟아오르고 싶어. 세상이란 큰 바다 위에 작지만 힘차게 온몸으로 노래하며 떠 있는 희망의 섬이고 싶어.
-시집 <시간의 얼굴에서> 중에서
부산 광안리 바다가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직접 바닷가에 나가본 지 일 년이 넘으니 늘 바다가 그립습니다. 그래도 매일 멀리서나마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으며 일출과 일몰의 바다를 더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한때 ‘no man is an island’라는 노래를 즐겨 듣고 즐겨 부른 일이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홀로’ ‘함께’ 떠 있는 섬인 우리. 이왕이면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섬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봅니다.
직접 가지 못하는 바다를 마음 안에 품고 사는 요즈음, 함께 사는 사람들 안에 있는 각기 다른 지혜의 바다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일상의 삶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바다를 닮은 하늘은 또 어찌 그리 넓고 맑고 푸른지요!
요즘은 여행도 못하고 출장도 못 가고 오로지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지 않으냐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심히 보았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며 인생학교에 새로 입학해서 공부하는 늦깎이 학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각자가 골방의 영성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한 파스칼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내적 생활을 소홀히 하고 너무 밖으로만 겉도는 생활을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덮쳐온 코로나19로 할 수 없이 집 안에 있게 된 상황으로 인해 우리는 안팎으로 잃은 것도 많지만 또 한편으론 각자의 인생관이 달라졌거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도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나무들도 월동 준비를 하는 11월, 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계절입니다. 며칠 전부터 검은 수도복으로 옷을 갈아입으니 김현승 시인의 ‘검은빛’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주는 빛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검은 옷을 입고 바라보는 푸른 바다가 오늘도 설렘을 안겨주는 이 시간.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조용히 가리워줄 줄 아는 검은빛의 지혜를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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