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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군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맞추어 행할 뿐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사서삼경에 빠져 살았던 옛사람들은 과연 <중용>의 이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서 욕심 없는 삶을 살았을까? 부귀든 빈천이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군자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여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늘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채 남 탓, 하늘 탓을 일삼는 것이, 예나 이제나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18세기 문인 조귀명은 평생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종일 서재에서 책만 읽곤 하던 그에게, 가끔 방문을 열면 내려다보이는 뜨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세계였다. 작은 뜨락이지만 쏟아지는 달빛을 듬뿍 받아 안기에는 충분하다. 그 빛에 어른거리는 꽃과 나무의 그림자들은 맑은 물속에 마름풀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듯 마음까지 일렁일렁 춤을 추게 한다. 고즈넉한 즐거움을 누리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 “그대의 뜨락은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조귀명은 크고 작음이란 마음에 달린 일일 뿐이라고 답하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의 근심은 자기 것은 작다고 버려두고 남이 지닌 큰 것을 구하는 데에 있다. 늘 자신보다 잘살고 높이 오른 이들을 바라보며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는 삶에는 끝내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지금 나는 내 낡은 집으로 제운루와 낙성루의 화려한 건물을 대신하고, 내 작은 뜨락으로 금곡원과 평천장의 아름다운 정원을 대신하며, 내 서투른 시문으로 이백과 한유의 훌륭한 작품을 대신한다. 그 곁에서 거닐고 그 속에서 휘파람 부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하는 오늘날, 애써 구하려 하지 말고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충고는 시대착오로 보인다. 거기 기대어 내놓은 조귀명의 자기 위로 역시, 벗어나기 힘든 비교의식의 쳇바퀴를 떨쳐낼 최선의 방도는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는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정작 심각한 건, 선택조차 해보지 못한 채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욕망을 좇는 삶이다. <중용> 구절이, 그리고 한 문인의 고백이, 분수에 맞게 살라는 케케묵은 충고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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