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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맘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그믐날 뜨는 해와 설날 뜨는 해가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구획을 지어 떠들썩하게 의미를 부여해온 데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구태를 훌훌 떨쳐버리고 새 희망을 맞이하고 싶은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6세기 시인 노수신은 연말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지은 시에서 “어지러운 잡념들이 꼬리 물고 일어나니, 가볍게 다스려 조장도 망각도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더 번잡해지는 마음을 무겁게 억제하려 하면 오히려 안정을 이룰 수 없는 법, 조바심에 일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되 그렇다고 손 놓고 방기해서도 안된다는 맹자의 말을 송구영신의 마음가짐으로 삼은 것이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송구영신의 때에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굶주리는 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연말연시에 장패(藏牌)의 명이 내려지곤 했다. 범법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순찰 군관에게 평상시 지급하는 것이 금패(禁牌)인데,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회수하여 보관하라는 명이다. 금지된 도축을 일시적으로 허용함으로써 도성 백성들이 명절 음식을 마련하고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도 팍팍한 현실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송구영신의 시간만큼은 허락되어야 한다는 마음이다.

며칠 전 굶주림 끝에 우유 두 개와 사과 몇 알을 훔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현장에서 발각되었지만 상점 주인도, 경찰관도, 지나던 행인마저 이들에게 처벌보다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감동의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보다 더 딱한 사정을 지닌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렇게 부각된 사례에만 반응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한 해 내내 굶주리는 이들이 즐비하던 조선시대에 연말연시 며칠 동안 고기 맛을 보게 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알묘조장을 경계하다가 작은 실천의 마음마저 아예 잊고 지내서는 안될 일이다. 아무리 미약하다 하더라도, 온정은 온정대로 가치가 있고 의외의 전염력을 지녔다. 더구나 금패도 거두어들인다는 송구영신의 때가 아닌가.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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