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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촉감도 소리도 아름다운 우리말 ‘몸’을 한자로 번역한다면, ‘기(氣)’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에서는 기를 ‘qi’로 표기한다. “기분(氣分), 감기(感氣), 기가 막힌다” 등은 몸 상태를 잘 표현하는 말들이다. 감기는 기운, 기(氣)의 운(運)을 느끼라는 몸의 알리미다. ‘기’에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없다. 죽음은 몸의 일부인 정신이 빠져나가는 과정이다. 몸에 해당하는 영어가 ‘보디’가 아니라 ‘정신이 깃든 신체(mindful body)’인 이유다. ‘보디’가 홀로 쓰일 때는 시체, 몸통, 실체 등의 뜻이다. 

기는 몸의 총체적 에너지다. 기(氣)가 나뉜(分) 상태의 균형감에 따라 “기분이 좋고”, 그렇지 못할 때는 “기분이 나쁘다”. 기분의 배분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 사람마다 기분이 좋은 상태의 비율이 다르다. 통념과 달리, 기분은 순간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다. 과학이다. 배우 하정우는 그의 책에서 기분의 위력에 대해 정확하게 썼다.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개인의 다양한 에너지가 적절하게 분배되어 기분이 좋을 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 기분이 좋을 때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기분은 개인 차원의 에너지가 아니다. 사람의 기분은 사회, 인간관계, 사건에 의해 변화하는 정치경제의 동학을 따른다. 이것이 감정의 물질성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계급의 양극화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계급이 거의 모든 인간의 조건을 양극화시킬 수 있는 절대적 요소가 된 세상을 말한다. 외모, 실력, 교양, 성격, 건강, 행복이 돈에 의해 좌우된다.

오늘날 공중 보건 이슈는 기분을 관리하는 심성의 양극화로 인한 것이 많다. 우울증은 일종의 기분 장애(mood disorder)인데, 그간 우울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정설이 있었다. 하나는, 성별. 성별에 따라 증상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분노할 수 있는데, ‘남성(사회적 강자)’은 분노를 타인에게 폭력으로 표출하고 ‘여성(약자)’은 자기 탓으로 돌리는 우울 경향이 있다. 남 탓으로 돌리는 투사(投射)와 내 잘못이라는 내사(內射).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이 사라져가고 있다. 우울증도 흡연 경험이 없는 이들이 폐암으로 사망하는 경우처럼, 질병의 인과관계를 간단히 규명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유난한 저출산, 우울증, 자살 문제는 우리에게 건강, 인간관계,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남성의 우울증도 심각하다. 게다가 여성의 자살 시도는 고통을 호소하는 ‘의사소통’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남성의 자살 시도는 목적과 의사가 분명한 경우가 많다.

또한 예전에는 일상적인 우울한 기분과 질병으로서 우울증을 구분했는데, 요즘은 이 구분도 흐려졌다. 일상과 질병의 경계가 흐려지면, 적당한 진료 시기를 놓치기 쉽다. 증상이 나의 본모습인지, 아니면 병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우울증은 타인으로부터 이해받기 힘든 병이다. 오해와 해명, 좌절이 반복된다. 명확한 ‘신체 질환’으로 간주되는 질병과 달리, 우울증이나 치매, 조현병 등은 아픈 사람이 나쁜 사람 혹은 위험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문명사는 곧 질병사이다. 오늘날 일시적 기분이든 심각한 질병이든, 우울하지 않은 이들이 없는 것 같다. 사회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많고, 잘못해도 뻔뻔스러움으로 무장하고 혼자 ‘정신 승리’를 선언하는 이들도 많다. 두 경우 모두 기의 사회적 균형이 깨진 상태다.

정신적 질환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보니, ‘정신 승리자’가 강한 사람으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이로 여겨지는 것은 큰 문제다. 악화가 양화를 짓누른다. 앞서 말한 대로 기분은 몸의 물리(物理)다. 기분 총량의 법칙은 개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는 기분의 총량이 있다. ‘갑질’은 타인의 기운 분배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건강은 개인의 관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힘내라”는 말에, 도리어 힘이 빠진 경험을 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운 내라? 없는 기운을 어디서 낸다는 말인가. 기운은 내는 것이 아니다. 주고받는 힘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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