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부터 공부방에 앉았는데 창밖 어둠이 칠흑 같다. 또 때가 된 것인가. 괜히 마음이 급하다. 뭔가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부방에는 불도 켜지 않았다. 들릴 듯 말 듯 방에 가득 찬 피아노 소리를 두 귀에 걸고 멍하게 어둠을 바라보고 있은 지 두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어찌 일 년 동안의 많은 일들이 두어 시간 만에 정리가 되겠는가. 철이 들고 난 후 해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해도 해도 꺼림칙하다. 그처럼 개운하지 못한 까닭은 일 년 365일 동안 겨우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를 가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 자신이 참으로 멍청하고 바보같다고 해마다 되뇌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사실 오늘이 201..
지난 11월13일, 양주 대아산업개발(주)에서 30대 이주노동자인 프레용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회사의 무성의한 태도로 현재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차가운 영안실에 안치돼 있다. 사고 원인은 김용균씨가 목숨을 잃은 이유와 비슷하다. 컨베이어벨트의 비상장치, 방호장치가 없었고, 안전통로는 확보되지 못했다.2018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이주노동자는 136명, 사고자는 7239명이다. 제조·건설업에서 각각 49명, 61명이 사망했다. 이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업무상 재해로 승인된 통계일 뿐, 현실을 반영하진 못한다. 가령 어업의 경우 통계상 연도별 사망자는 0 내지 1인이다. 2011~2015년 어업작업안전재해현황을 보면, 연도별 사망자는 118~183명에 이른다. 어업은 어선원안전보험 가입률이 50%..
‘착하다’는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정의하지만, 이것만으로 완벽한가? 고운 말 쓰고 법과 규범을 잘 지키며 살면 착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범과 곰이 한 동굴에서 살았는데, 늘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곰은 이 말을 잘 지켜 사람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그러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날마다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 기이편)근대의 민족 기원 담론에 따르..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의 한국판 띠지에는 김애란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짧은 추천사가 적혀 있다. “울지 않고 울음에 대해 말하는 법.”이 한 문장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샀다. 나 역시 울지 않고 슬픔에 대해 잘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를 펼쳐들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데니즈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데니즈의 상사이자 다정한 친구인 헨리의 목소리로 이렇게 서술한다.‘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데니즈가 슬펐다고 말하..
학기말을 맞아 학생들이 2차 지필고사 성적과 수행평가 점수를 합산한 2학기 종합 성적표를 받았다. 교과 담당교사가 최종 성적표를 가지고 들어가 학생들에게 점수 확인을 하고 사인을 받는다.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의 여러 반응을 통해 1년간 가르쳐온 수업과 학생들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전에 찬우(가명)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마지막 학기 53점에 6등급을 받았다. 그는 자기 성적을 보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나도 그와 손뼉을 마주치며 같이 기뻐했다. 그는 평소 한문 공책을 들고 나를 찾아와,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질문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해서 그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점차 이해하는 것이 늘어났고, 처..
중요하다의 다른 말 ‘대수롭다’의 어원은 ‘대사(大事)롭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일 아니면 ‘대수롭지 않다’고 하지요. ‘대수롭지 않다’와 비슷한 말이 ‘소소하다’입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도 오랩니다. 그만큼 오래도록 소소한 것 말고는 추구할 행복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할 겁니다. 장래가 막막하니 확실한 당장만 즐길 수밖에요. 욜로(You Only Live Once)도 연일 유행입니다 ‘인생은 한 번뿐’을 ‘인생 뭐 있어’로, 소중을 대충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많은 “욜로!”란 어쩌면 “큰 건 포기!”라는 감탄사 아닐까요?‘산이 높아야 골이 깊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품은 뜻이 높으면 생각 또한 깊다는 뜻입니다. 산의 높이는 골짜기의 깊이지만, 여기서 ‘골’..
대한민국 시상식의 수상 소감은 ‘황정민 이전’과 ‘황정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요. 왜냐하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저는 그럼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죄송스러워요.”(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황정민만큼은 아니더라도, 지난 29일 열린 MBC 방송연예대상의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었다. 3수 끝에 대상을 거머쥔 박나래. “제 키가 148(㎝)이다. (대상 타고) 여기 올라와 처음으로 여러분들 정수리를 본다. 제가 볼 수 있는 시선은 여러분의 턱이나 콧구멍이다. 항상 여러분의 바닥에서 위를 우러러봤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하겠..
한 해가 밋밋하게 짝수로 끝나지 않고 하루가 돌출해 있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해년 삼백예순다섯 날은 그날로 수렴되어 가고 있다. 등대처럼 반짝거리는 그 마지막 날에 바닷가나 산정으로 가서 일출을 보면서 또 살아갈 날을 가늠해 보고 그에 따른 많은 결심을 한다. 얼마 남지 않은 그날을 염두에 둔 마지막 주말.채널의 맛은 돌리기보다는 끄는 데 있다. 뻔하고 빤한 텔레비전을 간단히 처치하고 남한산성을 찾았다. 총각 시절 꽤 자주 찾았던 예전의 정취가 그런대로 남아 있다. 오랜만에 걷는 길은 더욱 낮고 단단하게 다져졌다. 한 해 한 번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하다. 연말을 기념하여 공중의 말씀 같은 눈발을 기대해 보았지만 하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울퉁불퉁 성곽길과 호젓한 오솔길을 번갈아 걸었다. 추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