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2020년이 왔고, 신춘문예 심사를 마친 선생님들은 심사평을 송고한 후 쉬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 년 사이에 가득했던 사고들과 대체 매체들의 확장으로 문학이 왜소해진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신춘문예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문청들은 문학의 자장 안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올해 키워드가 퀴어와 SF, 비인간 캐릭터 등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오늘 이렇게 지면을 빌려 펜을 든 것은 기사를 보고 든 한 가지 우려 때문입니다. 선생님. 장르의 코드를 비평할 때 게으르게 비평해 놓으신 건 아니겠지요. 다른 문학을 비평하듯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치열하게 고민해주셨겠지요. 제발 그러셨으면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장르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20살, ..
1977년 미국에서 발사한 보이저 1호는 지금도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90년 명왕성 정도의 거리를 지날 때, 보이저 1호는 카메라를 돌려 우리 지구가 담긴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냈다. 사진 속 지구는 정말 작아 보인다. 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이 사진에서 얻은 영감과 통찰을 담아 을 출판하기도 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저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때로는 복작복작 싸우고 미워하고, 때로는 서로 돕고 사랑하며, 우리 모두는 짧은 삶을 산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평균거리를 1천문단위(AU)라 한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우주로 보낸 모든 것 중 현재 가장 멀리 있어, 약 150천문단위의 거리에 있다. 지구에서 명왕성까지 거리의 3배가 훌쩍 넘는 거리다. 이 정도로..
우주정거장에서 본 1월1일의 지구는 역동적이다. 날짜변경선 바로 앞 뉴질랜드 북섬의 기즈번에서 시작된 ‘카운트다운-불꽃놀이-해맞이’는 서쪽으로 새해 첫날을 한바퀴 돈다. 그 앞뒤로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게 또 있다. 국가·조직의 리더들이 내놓는 신년사(新年辭)이다. 세계 이목을 붙잡는 신년사는 근래 북한의 몫이었다. 국정의 축과 방향을 유달리 신년사에 담고, 대외 메시지의 지속성(사이클)이 긴 까닭이다. 2018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창 올림픽 참가” 의사를 비치며 한반도 해빙을 연 것도 신년사였다. 지난해엔 7~8개 마이크가 세워진 딱딱한 단상을 벗어나 양복 입고 집무실 소파에 앉아 새해 메시지를 30분간 낭독했다. ‘정상국가’ 이미지를 한껏 과시한 해였다. 그렇게 2013년부터 1월1일 오전 9시(..
다리에 쥐가 난다고 할 때 쥐가 있고 굴을 파서 드나드는 긴 꼬리 들쥐가 있다. 다람쥐나 박쥐는 쥐하고는 한패가 아니지만 도리 없이 이름표를 붙이고 산다. 물속에도 쥐가 사는데 쥐포를 해서 먹는 쥐치가 그것이다. 주둥이가 쥐처럼 길어서 아마 쥐를 갖다가 붙인 거 같다. 한번은 목사관 내 처소 다락에 다글다글 쥐가 살았다. 하도 시끄럽게 뛰노는 통에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쥐 끈끈이를 놓기도 하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가히 신출귀몰이었다. 퇴치 기도를 해도 전혀 안 먹혔다. 아무튼 나는 목사로서도 자질이 여러모로 부족. 쥐가 조용한 순간은 사람이랑 매우 비슷했다. 첫째, 내 이야기에 귀를 모으는 중이거나 아니면 둘째, 내 이야기가 지루하여 조는 중. 셋째는 이제 저 차례, 다른 할 말을 준비하는 순간..
나를 비롯해 기자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달력을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달력이라는 물건보다 ‘계기가 있는 날’을 좋아한다. 그날 발생한 사건·사고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안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쓰려면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계기를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달력이다. 업계 용어로 흔히 ‘카렌다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아이폰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을 계기로 혁신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짚어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타이밍은 이른바 ‘꺾이는 해’다. 3주기, 4주기보다는 ‘5주기’, 8주기나 9주기보다는 ‘10주기’가 뭔가 더 있어 보인다..
신인류가 몰려온다고 전 세계가 흥분하던 2000년대 초반, 필자는 여성 이슈를 취재하는 기자였다. 대한민국 여성부가 출범한 때가 2001년 1월. 세기가 바뀌는 전환기에 김대중 정부는 방점을 ‘여성, 성평등’에 찍은 것이다. 굵직굵직한 성평등 정책들이 숨가쁘게 논의되고 만들어졌다.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1999), ‘모성보호 3법’ 도입(2001), 성매매방지법 제정(2004), 호주제 폐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법 개정(2005)….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계속 개정되며 보완을 거듭했다. 일간지 대부분엔 여성면이 있었다. 여성학자들, 여성운동단체들은 좌우, 진보·보수 없이 연대해 정책을 만들고, 변화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일순간 이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몰아붙인 제도들이..
연말 송년회 시즌을 앞두고 이런저런 단기아르바이트를 했다.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술값이라도 좀 벌어볼 요량이었다. 상하차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는 배제했다. 술값 벌려다가 병원비가 더 들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빼도 과연 현대사회, 별의별 아르바이트가 다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사용될 목소리 녹음이었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인공지능에 관련된 일이라니. 돈도 벌고 미래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다음날 아침,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합정동에 있는 오래된 오피스텔의 오래된 방이었다. 오래된 노트북 한 대와 오래된 마이크가 장비의 전부였다. 혼자 기다리던 남자는 말없이 노트북 화면을 켜고 지정된 단어들을 낭독하라고 했다. 약 20분에 걸쳐 몇백개의 단어를 읽었다. ‘교..
울산시장 선거를 둘러싼 청와대 ‘하명수사’와 선거개입 의혹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지난달 31일 법원에서 기각됐다. 송 부시장은 김기현 전 울산시장 측근 비위 의혹을 수집해 청와대 행정관에게 제보하고, 울산시장 선거 관련 전략·공약 등을 청와대 인사들과 논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공무원 범죄로서의 이 사건 주요 범죄 성격, 사건 당시 피의자의 공무원 신분 보유 여부, 피의자와 해당 공무원의 주요 범죄 공모에 관한 소명 정도 등을 고려하면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과 상당성이 충분히 소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기각 사유를 종합하면, 송 부시장에 대한 검찰 수사 내용이 전반적인 혐의를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