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해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종종 차를 운전하고 다님에도 교통사고를 피했다. 운전을 하고 다님에도 싱크홀(땅꺼짐)도 만나지 않았고, 포토홀(포장면에 구멍이 생기는 것)도 당하지 않았다. 지난해 2월 제주도행 비행기 타고 가다가 죽는 줄 알았지만 결국은 무사했다. 공사 현장 옆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다행히 크레인이 넘어가거나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겪지 않았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 있었지만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저런 사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병에 걸려 죽는 이들도 있었지만 돌연한 사고로 죽어간 이들도 있고, 아직까지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올해도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안전사고라는 게 미리 예고를 하고 오는 ..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는 아베 일본 총리의 사과 메시지와 더불어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약 100억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의 밀실협상이 낳은 이 합의를 할머니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가해자의 법적 책임 인정을 전제로 하지 않은 사과나 위로금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의 부제는 ‘위안부 문제의 주 전쟁터’이며, 이는 미국을 의미한다. 2018년 초 주미 일본 대사로 부임한 스기야마 신스케는 자신의 우선과제가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 도시들을 찾아가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 즉 기림비 철거를 위한 로비라고 공언했다. 또 2019년 새로 부임한 LA 일본 총영사는 글렌데일 시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글렌데일 소녀상 철..
‘현장에 답이 있다.’ 자주 쓰이는 말이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이하는 중에, 불가피하게 일종의 연말결산 같은 몇 군데의 공적 회의에 참가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든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네댓 번 들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어디인가?우선 문자 그대로 ‘물리적 현장’이 있다.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현장 말이다. 공연장이라면 무대의 음향이나 조명 시설에서부터 관람객의 동선에 따른 주차장이나 객석 의자를 점검할 수 있다. 스포츠의 경우에는 운동장이나 훈련장의 시설들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위 패턴을 분석할 수 있다. 이로써 노후 장비를 보수하거나 교체하고 이용자들의 불편 사항을 개선할 수 있으며 더 적극적..
지난 연말 선거연령 하향 소식을 듣고,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가며 참정권 운동을 해온 청소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삭발을 하고 집회를 하고 성명서를 내며 싸워온 청소년들을 몇 년 동안 인터뷰하며 그 절박함을 가까이서 느꼈던 터다.한 청소년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좋긴 한데, 걱정이에요.” 기사를 보고 뛸 듯이 기뻐 반 친구들에게 말을 꺼냈더니 “아, 그러냐” 하고 남의 일인 듯 시큰둥하더란다. 21대 총선 얘기에는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벌써 끝났냐”고 되물어 당황했다고. 총선이 누굴 뽑는 선거인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건 “수능 준비하기도 바쁜데 또 무슨 필수과목 넣는 거 아냐?” 하는 냉소였단다.이 얘기가 그리 놀랍지 않았던 건 그간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소수의 ..
요즘 ‘경자년 쥐의 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쥐의 해 경자년(庚子年)이 되려면 아직 20일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갑자년이니 을미년이니 하는 육십갑자의 기준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기 때문이다. 오는 25일, 즉 설날이 경자년의 시작점이다. 지금은 여전히 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다.또 이맘때면 “구랍 31일 충북 진천 버스터미널에서 발견된 폭발물 모조품은…” 따위처럼 ‘구랍(舊臘)’이라는 말을 쏟아내는데, 이 역시 아직은 쓸 수 없다. ‘구랍’이란 “지난해의 섣달”, 즉 음력 1월에 전년의 음력 12월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구랍’ 역시 오는 25일부터 쓸 수 있다.우리는 전통적으로 음력을 써 왔다.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
마침내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됐다.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하향된 지 15년 만의 진일보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입맛이 찝찝할까.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채 선거제도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는 최대 쟁점에 묻혀 덤처럼 통과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통과됐으면 그만일까? 그러기엔 이 의제의 잠재력이 아깝다.치열한 논쟁의 주제는 사실상 딱 하나였다. ‘만 18세는 선거권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한가?’ 선거에 참여하려면 정치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주제다.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쪽이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접점 없는 논쟁은 공회전만 반복했다.그런데 만 19세를 넘어가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지는가? 이 질문이 먼저 던져져..
기해년에 보고 듣고 읽은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치국은 나라를 다스린다고만 굳건히 알았는데 나라를 치유한다고 새길 수도 있다(배병삼의 ). 노자에서 지극히 좋은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의 ‘상선,약수’를 ‘상,선약수’로 끊어 읽으면 상투적인 말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런 뜻밖의 뜻을 얻을 수도 있다. 윗대가리가 물처럼 잘해야 한다. 덕불고필유린.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풀이가 아주 강고하다. 이 또한 조금 비틀어보면, 덕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더불어 함께하는 덕목이 있다(). 마치 불행이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오는 것처럼.경자년이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올해는 또 무슨 생각이 찾아올까. 강가에 한해살이풀처럼 서서 흘러가는 것을 거저 바라보기에는 시간이 얼..
오늘의 한국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한때 국내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동차 브랜드의 새 광고를 보았다. 시리즈의 제목은 ‘2020 성공에 관하여’. 동창회에서 승진을 자랑하고, 어린 아들과 고향 어머니 앞에서 호기를 부리며, 동료 앞에서 당당하게 퇴사하고, 여전한 젊음을 과시하는 내용이다. 대놓고 속물적인 광고였지만, 제법 마음이 흔들렸다.가격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저렴한 차는 아니지만, 좀 무리하면 장만할 수 있다. 드디어 성공을 손에 쥘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동네에 자가용 가진 이를 손꼽던 시절의 추억과 도로를 가득 메운 고급 차의 행렬이라는 현실 사이의 파열에서 오는 착시다. 그러니 대단한 성공이라며 으스대긴 멋쩍다. 하긴 고급 세단을 모는 공무원을 단속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