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가끔 페이퍼나이프를 선물받곤 했었다. 그런 선물을 받고 나면 어디서 우편물 올 데가 있을까 기다리곤 했는데, 그 날렵하다고 할 수 없는 칼날로 봉투 끝을 가르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페이퍼나이프를 선물받곤 하던 시절에도 손으로 쓴 편지 같은 게 오던 시절은 아니었다. 그러니 기껏해야 페이퍼나이프를 써서 열어볼 게 고지서 따위들이었는데 그래도 그 사각사각 종이를 가르는 소리가 좋아서 기분 좋게 봉투를 열어보곤 했다. 지금은 그나마도 쓸 일이 없게 되었다. 대개의 우편물은 e메일로 오고, 택배로 받는 물건들은 페어퍼나이프로는 개봉이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니, 이 나이프들은 이제 내 책상 위 장식품이 되었을 뿐이다.이 나이프는 북나이프로도 불린다. 수공으로 책이 제작되던 시절에는 기술..
지난해 말 선거법 개정, 공수처법 제정 등 상징적인 일이 많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은 핀란드 30대 여성 총리 탄생과 한국의 70대 남성 국무총리 지명이다. 두 장면이 강하게 겹친 이유는 각 장면을 만든 인식의 간격, 앞으로 만들어질 다른 미래와 격차가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누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잘할 것’이란 판단은 개인에 대한 판단처럼 보이지만 사실 특정 집단이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을 살피기 위해 활용된 교육자료가 있다. 부자가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가 나서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환자를 본 의사가 ‘내 아들’이라고 놀라는 장면을 보여주며 의사는 누굴까 질문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답을 못한다. 이유는 의사 하면 ..
유신 시절, 깐깐하다고 소문난 어느 재판장이 검사를 혼낸 이야기다. 공판에 참여한 검사가 무료했던지 시도 때도 없이 볼펜을 손에 쥐고 촉을 내밀었다 들였다 하면서 딸깍 딸깍 소리를 냈다. 재판장이 정리(현재의 칭호는 법정경위다)를 부르더니 검사를 가리키며 일렀다. “어이, 정리, 저기 저 볼펜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 있잖아, 법정 밖으로 내보내게.” 그 검사, 얼굴이 벌게지더니 다시는 그 짓을 못했다고 한다.얼마 전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 사건의 심리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오해를 피하려고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내가 그 사건에서 주목하는 것은 검사의 항의나 주장, 판사의 대응과 판단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따위가 아니다. 형사사법의 운영과 관련하여 보이는 새로운 경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경..
‘덤벨 경제(dumbbell economy)’가 화두다. 덤벨 경제는 건강과 체력 관리에 관한 소비가 늘고 관련 시장이 크게 호황을 누리는 경제 현상을 말한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덤벨 경제 열풍이 최근 한국에서도 불고 있다. 헬스·요가 등 관련 시장뿐 아니라 이를 보조하는 식품·운동용품 등의 부대 산업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덤벨 경제에 힘입어 2019년 식품업계의 최고 키워드는 ‘단백질’이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글로벌인사이트리포트는 세계 단백질 식품 시장이 연평균 12.3% 성장해 2025년 32조8800억원 수준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덤벨 경제의 단백질 열풍으로 식용곤충이 훈풍을 맞고 있다. 식품 원료로 등록된 갈색거저리, 흰점박이꽃무지 등 식용곤충의 40~70%는 양질의 단백질로 구성돼 있..
본격적인 방학 시기다. 방학식 전 일선 초·중·고교의 행정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중에서도 방학 중 급식 대상자 신청을 받아 방학 중에도 결식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다.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방학 중 급식 신청 문자 메시지는 방학이 오고 있다는 알람이기도 하다. ‘급식 지원 대상’이란 말도 이제 방학에만 해당한다. 서울시가 2019년 1학기 고3 학생부터 무상급식을 시작해 2021년 고등학교 1~2학년까지 적용 대상을 늘려 무상급식을 전면 실시할 예정이다. 각 지자체들도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대부분 고등학교 무상급식을 시행하거나, 시행할 예정이다.이제 학기 중에는 아예 급식 지원 대상자를 신청하고 선정하는 과정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방학 중 급식 지원 대상자에 대한 안내도 끼니의 사각지대에..
골목마다 현수막이 나부끼는 걸 보니 선거의 계절이 온 것 같다. 그러나 여성 공천 문제는 매번 4년을 주기로 ‘불행 회로’ 속에 갇힌다.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20년 전 도입된 여성 할당제 얘기가 나온다. 레퍼토리도 한결같다. 역차별, 특혜…. 선거제 개정 이후 여성 할당제 반대론자들의 무기인 당선 가능성마저 강조된다. 다당제 출현으로 후보자 경쟁력이 더 중요해졌다면서. 전직 미국 대통령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이 2년만 통치해도 엄청난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 시대에 227년 전 여성 참정권을 외치다 처형된 올랭프 드 구주를 떠올릴 줄이야. 왕정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여성을 소외시켰다며 “여성은 교수대에 오를 권리도,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구주를 단두대 위에 세웠다. 차..
24절기 모든 명칭이 최초로 기록된 문헌은 기원전 139년 중국 전한 대 류안이 저술한 ‘회남자’로 알려져 있다. 회남자는 중국 최초의 공식 반포력인 태초력에 채택된 이래 모든 역법의 기준이 됐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국의 24절기는 화북지방을 기준으로 했기에 우리와 맞지 않았다. 1444년 세종은 이순지와 김담에게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의 해설서를 편찬토록 했다. ‘칠정산내편’은 수시력을 기초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역법 개발은 농업국가의 최우선 국책사업이었다.경칩(驚蟄)은 동지로부터 72일 지난 날이다. 양력으로는 3월5일 또는 3월6일이다. 날씨가 따뜻하여 각종 초목의 싹이 트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 위로 나오려고 꿈틀거리는..
“정 박사님이죠? 디스 이스 피터. 우리가 이겼습니다.” 상기된 목소리의 피터 바돌로뮤의 전화를 받은 게 2009년 봄, 11년 전 일이다.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1968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고, 강릉 선교장에서 5년 가까이 머물다 한옥의 매력에 푹 빠졌다. 서울로 와서 잠시 여의도 아파트에 살았지만, 흙도 마당도 없는 답답한 곳을 떠나 1974년 동소문동 한옥으로 이사해 50년 가까이 한옥에서 살고 있다. 2004년 봄, 자신의 집을 포함해 동네가 재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된 걸 알고 이웃들과 함께 재개발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2008년 재개발구역 지정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1년 만에 취소결정을 얻어냈다. 재개발 않고 지금의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