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화가다. 지금은 사라진 신문 소설 삽화로 2002년에 데뷔했다. 인터넷 만화도 그 무렵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른 시도였다. 그런데 정작 웹툰은 많이 그리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다. 그냥 내가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트렌드에서 동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자주 한다. 비슷한 문제로 마음 졸이는 친구들과 요즘 하는 이야기가 말과 자동차의 비유다.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말이나 마차를 탔다. 그런데 이제 대부분의 사람은 마차 대신 자동차를 탄다. 말과 자동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하기 쉽다. 종이만화가 말이라면 웹툰은 자동차다. 음반 대 음원 다운로드, 종이책 대 팟캐스트, 종이신문 대 온라인 매체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들었다. 유튜브, 즉 지금의 자..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이하 경칭 생략)가 연초 정계복귀를 선언한 직후다. 한 페이스북 페이지에 ‘누가 더 정치를 잘할 거라 생각하나?’라는 설문이 올라왔다. 선택지는 안철수와 ‘펭수’ 둘이다. 누구를 내세운들 ‘직통령’ 펭수를 당할 리야마는, 안철수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때 청년들의 희망이었던 안철수로서는 실로 격세지감이다. 다분히 흥밋거리 설문이 눈길을 끈 건 펭수에 반사되는 안철수의 특성 때문이었을 게다. 펭수에게는 있지만 안철수에게는 부족한 게 있다. 메시지의 명료함과 구체성이다. 정치언어로 바꾸면 뚜렷한 노선과 원칙, 정체성이다. 리얼미터 여론조사(1월7일)에서 안철수의 정치노선을 ‘보수적’으로 인식하는 응답이 28%, ‘중도적’ 17%, ‘진보적’ 9.6%로 나타났다. 그리고 ‘모..
마이클 샌델의 저서 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지만 요즘은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교도소 수감자들이 추가 비용을 지불하면 깨끗하고 조용하면서 다른 죄수들과 동떨어진 개인 감방으로 옮길 수 있다. 비용은 1박에 82달러.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나 홀로 운전자’라도 돈을 내면 2명 이상 탑승차량을 위한 ‘전용 차선’을 이용할 수 있다. 교통량에 따라 다르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8달러다. 당일 바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의사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도 판매된다. 연간 1500~2만5000달러 수준이다. 미국으로 이민할 수 있는 권리는 50만달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멸종위기에 놓인 검은코뿔소를 사냥할 수 있는 권리는 15만달러다.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
새해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마다 많이 들리는 성어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새해의 시작을 맞아 운동, 금연, 외국어 공부 등 모처럼 작심한 일들이 며칠 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만 데 대한 후회와 자괴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이다.작심삼일은 고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사흘 고기 잡고 이틀 그물 말린다는 뜻의 ‘삼천타어(三天打魚) 양천쇄망(兩天쇄網)’이라는 중국어 표현, 머리 깎고 승려가 된 지 사흘 만에 못 견디고 환속한다는 뜻의 ‘삼일방주(三日坊主)’라는 일본어 표현 등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작심삼일은 17세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우리 고유의 성어다.사실 어떤 목적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는 뜻의 작심(作心)이라는 어휘 자체가..
KTX역 지하에 결혼식장이 있었다. 역 대합실 1층에서 이어진 긴 지하 터널을 통과하면 거짓말처럼 결혼식장이 나왔다. 조도가 낮아 희읍스레한 터널 끝 유리 격자문 안쪽에는 한낮 햇빛처럼 밝은 빛이 아롱거렸다. 그 문이 열리면 미지의 세상이 있을 것 같은, 혼자 길을 걷다 둘이 만나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결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세상을 떠난 친척 아저씨를 떠올렸다.그런데 키가 커서 한참 올려다봐야 했던 그의 선한 얼굴이 신랑의 모습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꼬마였을 때 서너 번 보았을 뿐이고, 친척 아저씨가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주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신랑을 단박에 알아봤다. 한때 청년이었지만 노인이 된 친척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쌀자루를 번쩍 들..
기후변화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빨리 가속화되고 있다. 정부기관들이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서고 있으며, 법정에서는 기후 소송이 진행되는 등 풀뿌리 시민운동도 앞장서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전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1000명은 기후변화 대처 비상선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이 즉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바이오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고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행동지침을 제시했다.이들이 제시한 지침은 먼저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고 화석연료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는 동시에 강력한 탄소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메탄과 블랙카본 등 단기성 온실가스를 신속하게 줄이자는 주장이다. 셋째는 산림을 비롯한 자연생태계를 복원 및 보호함으로써 이들 생..
대학에 입학하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생애 첫 투표를 한다고 들떠 있는데, 선거일보다 며칠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에게는 투표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선거에 대해 이러저러 떠드는 친구들 속에서 혼자 소외된 기분에 꽤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일이, 투표도 하지 못해놓고, 내 생애 첫 번째 선거일이 되었다.그다음의 선거는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선거가 있는 날마다 아버지가 새벽 일찍 우리를 깨웠던 기억만 있다. ‘투표는 꼭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념이자 소신이었다. 그래서 어물거리다가 시간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자식들에게 투표권이 생긴 후에는 우리까지도 독려해서 투표소에 데려가시고는 했다. 잠도 덜 깬 눈으로 서늘한 투표소 복도에 서 있던 몇 번의 풍경이..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90분간의 회견은 지난해 11월 대화의 폭과 깊이에 갈증을 남긴 ‘국민과의 대화’보다 진일보한 소통이었다. 기자들이 국민적 관심사를 추렸고, 대통령도 각본 없이 때로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비친 자리였다. 내용적으로는, 참신한 국정동력이나 비전 제시보다 국정 현안을 설명하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는 답이 많았다. 4월 총선이라는 큰 변곡점이 있는 ‘집권 4년차’ 회견의 특징이 도드라졌다.대통령의 답은 어느 때보다 ‘협치’에 모아졌다. 문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정치문화가 달라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민생과 멀어져 일하지 않는 정치는 사실상 폐장된 20대 국회로 끝나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나아가 “(총선 후) 야당 인사 가운데서도 해당 부처의 정책 목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