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대전의 연구실에 출근했더니 연구동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불금’을 마치고 좀 쉬다가 나와도 좋고, 안 나와도 좋을 것 같은 때이지만, 대학원생들이나 박사후 연구원 등이 여지없이 출근을 한 것이다. 방학 중 연구하려고 머무는 학교의 전통에는 “새벽 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이라는 게 있다. 늦게까지 실험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로 가는 셔틀버스는 새벽 2시를 넘어서까지 출발한다. 또 이른 새벽 기숙사에서 연구동까지 학생들을 실어 나른다. 매점은 새벽 2시까지 운영되는데, 시험기간에는 그마저도 연장 운영을 한다. 교내 식당은 명절만 아니라면 세 끼 식사를 제공한다. 공부에 미쳐서 공부만 하라고 만들어낸 학교의 풍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9 to 6’ 바..
2020년, 한국 사회 생태 이슈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전환’일 것이다. ‘전환’은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찾는 일이다. 특히 ‘에너지 전환’과 ‘생태 전환’의 관점으로 올해를 예측할 수 있다. 에너지 전환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이끌었던 화석연료 및 핵 기반의 에너지원을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생태 전환은 개발주의 이면의 환경 훼손을 생태적으로 재자연화, 복원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올해는 에너지 전환의 주요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해결의 답은 에너지 전환에 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 원인은 석탄화력발전소, 그리고 석유를 사용하는 자동차, 선박 등 내연기관이다. 문재인 정부가 화석연료를 폐기할 수 있을지는 ..
다시 칼럼을 쓰기로 하면서 상큼한 글만 쓰자고 다짐했는데 쉽지 않다. 오늘도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는다. 스마트폰을 켜지 말았어야 했는데…. 호주 산불은 여전히 번지고 있고 미국은 호르무즈 파병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쟁터에 가고 싶다는 청년의 댓글이 올라와 있다.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될 테니 한 가지에만 관여하라던 사사키 아타루의 조언을 떠올려보지만 무력감은 이미 내 몸에 들어와 버렸다.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에 나오는 글처럼 “나는 그것을 물속에서 느끼고, 대지에서도 느낄 수 있고, 공기 속에서 냄새로 느낀다.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라졌다.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졌다”.2016년 말 광화문광장에서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5·18 광주는 그동안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온갖 왜곡과 폄훼라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왔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7일부터 27일까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북한의 남침 위협을 거짓으로 조작해 정권 무력 찬탈을 기도한 행위에 맞서 궐기한 광주 시민들의 저항운동이다. 5월21일 오후 1시경부터 27일까지 계엄군이 휘두른 총칼에 165명이 사망하고 84명이 행방불명됐으며, 3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이러한 불법적인 국가 폭력에 대해, 1988년 5·18진상조사특위 청문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국가기관의 조사가 총 9차례 있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과 중대한 인권침해 등에 대한 총체적인 조사가 미흡했고 12·12와 5·18 사건으로..
“성전환 수술 후에도 군복무를 이어가고 싶다.” 2020년 1월16일. 중요한 뉴스가 전해졌다. 남성으로 임관한 A하사가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육군이 그녀의 전역 여부를 심사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A하사는 성별 정정을 신청해 놓았으며, 정정 후에는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군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하사의 전역심사위원회가 열리는 이유에 대해 육군은 “음경 훼손과 고환 적출이 각각 5급 장애이고, 5급 장애가 두 개면 심신 장애 3등급으로 분류된다. 이는 전역 심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전역심사위원회가 열린다고 해서 A하사가 반드시 강제전역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이 뉴스는 이미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우선, 남군의 경우 음경과 고환이 없으면 장애로 판정된다..
사할린. 인천에서 비행기로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러시아 영토의 섬. 태평양을 바라보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섬은 남쪽으로 일본 홋카이도, 북쪽으로 러시아 본토와 마주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의 슬픈 역사가 새겨진 섬이다. 일제강점기로 거슬러간다. 당시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은 일본의 영토였다. 전쟁시기 일본은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수만명의 식민지 조선인을 남사할린 탄광으로 강제징용 보냈다. 마을마다 할당된 징용 몫을 채우기 위해서 맏형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신 징용길에 올랐고, 이제 막 결혼한 새댁은 남편 혼자 보낼 수 없어 보따리를 싸 뒤를 따랐다.사할린에 보낼 때는 일본 식민지 백성이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이 섬을 소련에 넘겨주면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겨졌다. 귀향선에 조선인은 ..
“그들이 비록 당신을 통해 태어났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당신과 함께 지낸다고 하여도 당신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되 당신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 아이들의 영혼은 당신이 꿈에서도 가볼 수 없는 내일의 집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레바논 출신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칼릴 지브란은 저서 중 ‘자녀에 대하여’에서 부모 자녀 관계를 이렇게 설파했다.교육열 높은 한국 부모들이 취한 태도는 지브란의 당부와는 정반대였다. 극한 경쟁의 불안한 시대, 불안한 부모들은 선행학습으로, 학습코치로, 자녀가 남보다 빨리 지름길로 갈 수 있도록,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업고 뛰며 공부의 답도, 인생 성공의 답도 미리 그려 아이 손에 쥐여줬다. ‘헬리콥터 부모..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주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은 발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잠시 잠깐 눈을 주리 발톱을 깎는 동안 말은 아끼리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그윽하게 바라다보리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주리 이재무(1958~)햇살이 환하게 밝은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발톱을 깎아주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고단한 일로 부은 발등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겠다고 말한다. 발톱을 깎다가 사랑하는 이의 이마 그늘도 가만히 바라보겠노라고 말한다.이 시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발톱과 발등과 이마를 바라보던 눈길이 멀리 “뜨락에 내리는 햇살”로 옮겨가는 데에도 있다. 발톱 깎는 소리만 들릴 법한 고요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