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나고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 서리가 내리면 어른들은 서둘러 겨울 맞을 채비를 하곤 했다. 떼어낸 문틀에 두 겹의 창호지를 바르고 그 사이에 국화잎을 몇 장 집어넣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나중에 소읍으로 이사갔을 때는 광에 시커먼 연탄을 쌓아두었지만 시골에서는 겨우내 볏짚을 땔감으로 썼다. 바람 잘 통하는 대청마루에는 통가리가 놓이고 두어 가마 고구마도 채워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장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월동 준비라는 말에서조차 격세지감이 든다.올겨울은 눈도 거의 없고 살을 에는 강추위도 아직 찾아오지 않아 부는 바람에서 봄뜻이 설핏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니까 더운 여름보다 체온을 유지하는 데 우리가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캐나다 북쪽 원주민 검은 발족의 추장 까마귀 발의 노래다. “삶은 이와 같은 거라네. 어둔 밤을 밝히는 반딧불이. 겨울 한복판에 들소가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 푸른 초원을 달려가다가 땅거미 지는 노을에 사라져가는 작은 그림자.” 들소의 코에서 훅훅 나오는 콧김이 떠오른다. 그리고 땅거미. 거대한 평지 대륙에 드리운 어스름이 그립다.저녁의 느낌은 늘 찌릿하다. 가수 김목인은 말했다. “밤이 오기 전 하늘은 살짝 밝아져 있었다. 슈퍼 앞 평상의 아저씨는 맥주 한 컵을 들고 아이들이 게임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타이르는 소리. 저녁이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암시하고 있었다.”다세대주택 골목 어딘가 드리운 저녁. 옥상에서 보이는 건너 공터의 땅거미. 개..
‘북쪽 바다에 사는 곤(鯤)이라 불리는 물고기가 있다. 곤의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새는 붕(鵬)이라 부른다. 붕의 등도 몇 천 리인지 모른다. 붕새가 한번 힘써 날면 그 날개는 하늘을 뒤덮는 구름과 같다.’ 는 ‘소요유’로 시작한다. 장주는 책 서두에서 거대 물고기 ‘곤’을 내세운다. 곤은 큰 바다를 헤엄치고, 곤이 변하여 된 붕새는 구만리장천을 비행한다. 곤과 붕새는 자유의 표상이다. 그런데 ‘곤’은 본래 큰 물고기가 아니다. 에 앞서 나온 는 ‘곤’을 ‘물고기 알’(魚子)로 풀었다. ‘물고기 새끼’(魚苗·稚魚)로 정의한 문헌도 꽤 된다.는 왜 새끼 물고기 ‘곤’을 거대 물고기로 둔갑시켰을까. 첫째는 장주 특유의 반어법이다. 그는 대소, 다과의 분별을 거부..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22일 채용비리 혐의로 기소된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에게 징역 6월·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조 회장은 신한은행장 재직 당시 신입사원 채용과정에서 인사담당자에게 전직 회장의 조카손자 등 3명의 지원 사실을 알려 이들을 부정하게 합격시킨 혐의(업무방해 등)로 재판을 받아왔다. 법원 판결은 채용과정에서 최고경영자 등의 책무를 엄하게 물은 것으로 의미가 크다.“○○의 자녀가 지원했다”는 상관의 말 한마디가 인사담당자에게는 ‘합격시키라’는 지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는 직위를 앞세운 부정한 지시다. 조 회장은 최후진술에서 “부탁받은 사람들에게 합격 여부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 큰 잘못이라고는 당시에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힘센 자들의 ‘합법적 특권’이 별..
지난해 육아휴직을 사용한 남성 직장인이 처음으로 2만명을 넘었다.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도 처음 20%를 넘었다. 한 손에 카페라테를 들고 유모차를 밀며 육아하는 아빠를 뜻하는 이른바 ‘라테파파’들이 수직 상승하고 있다. ‘아이 돌봄엔 남녀가 없다’는 생각이 삶에 반영되는 의미 있는 현상이다. 2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민간 부문의 남성 육아휴직자는 2만2297명으로, 전년에 비해 26.2%가 늘었다. 육아휴직자 중 남성이 차지한 비율은 21.2%였다. 2017년 남성 육아휴직자 1만명,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 10%를 돌파한 후 2년 만에 2배로 뛰었다. 남성 육아휴직이 처음 시작된 2001년 남성 휴직자는 2명(전체 25명)에 불과했다. 비약적인 증가다. 다만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자 ..
“꽃을 잡아당기면 못써.” 근린공원에서 산책 중에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옷소매만 잡아당겨도 아프잖아. 꽃은 얼마나 아프겠어.” 아이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미안해, 꽃아.” 오열하며 사과하는 아이 옆을 지나치는데 가슴이 뭉근하게 끓기 시작했다. 아이는 집에 가서 꽃을 잡아당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사는 동안, 무심코 꽃을 잡아당기거나 꺾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괴롭히려고 할 때마다 옷소매를 떠올리며 도리질을 할 것이다.저녁 약속이 있어 버스를 탔다. 퇴근 시간 전인데도 버스 안은 북적였다. 버스 뒤편으로 이동하다 한 중년 남성이 버스 안쪽을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구두 밑바..
‘금을 긋다’를 국어사전에는 ‘한도나 한계선을 정해 놓다’라고 해석해 놓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이 해석에는 부사가 빠져 있다. ‘제멋대로’,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짝은 책상에 제멋대로 금을 그어놓은 뒤 책 끄트머리가 금에 닿으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고, 지우개는 금을 넘은 만큼 잘라 갈취했다. 진짜 화나는 건 그 아이의 만행을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한 담임 선생님의 어처구니없는 중재였다. 그 시절 사내아이들의 폭력을 애정이라 치부하는 바람에 초래한 ‘폭력의 정당화’에 대해선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금을 긋다’는 말엔 ‘나’와 ‘타자’를 명확히 구분하며 ‘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숨겨져 있다. 살면서 사람들은 숱하게 금을 그으며 살겠지만, 그렇다고 2학년짜리처럼 대놓고..
촉감도 소리도 아름다운 우리말 ‘몸’을 한자로 번역한다면, ‘기(氣)’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에서는 기를 ‘qi’로 표기한다. “기분(氣分), 감기(感氣), 기가 막힌다” 등은 몸 상태를 잘 표현하는 말들이다. 감기는 기운, 기(氣)의 운(運)을 느끼라는 몸의 알리미다. ‘기’에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없다. 죽음은 몸의 일부인 정신이 빠져나가는 과정이다. 몸에 해당하는 영어가 ‘보디’가 아니라 ‘정신이 깃든 신체(mindful body)’인 이유다. ‘보디’가 홀로 쓰일 때는 시체, 몸통, 실체 등의 뜻이다. 기는 몸의 총체적 에너지다. 기(氣)가 나뉜(分) 상태의 균형감에 따라 “기분이 좋고”, 그렇지 못할 때는 “기분이 나쁘다”. 기분의 배분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 사람마다 기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