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밝다.”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밤늦게 일이 있어 번화가에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저 말이 튀어나왔다.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밝기였다. 밤하늘에 달이 떠 있지 않았더라면, 밤이라는 자명한 사실마저 의심했을 것이다. “심지어 낮보다 더 밝은 것 같아.” 인공조명 사이를 거닐며 친구가 말했다. 그는 빛에 민감해서 잠자리에 들 때면 암막 커튼을 친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밤에도 너무 밝거든.” 비슷한 시기, 운명처럼 (시공사, 2021)를 읽게 되었다. 저자인 아네테 크롭베네슈는 빛 공해의 원인에서 출발해 그것이 인간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다 읽고 ‘밤에도 밝으면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다. 무수한 인공조명 때..
2016~2017년 ‘촛불항쟁’ 때 반블랙리스트 운동에 나선 문화예술인들은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를 꾸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검열과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을 조사했다. 그 결과 블랙리스트로 직간접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이 무려 8931명, 단체는 342개로 집계됐다. 마음을 크게 다친 문화예술인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단지 일부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가 아니라 정권이 ‘좌파 척결’ 따위를 명분으로 거의 전 장르에 걸친 문화예술계에 개입하여 자율성을 갖는 문화예술계를 인위적으로 바꾸고, 또 이런 작용을 통해 전체 국민에 대해 극우 이데올로기를 선전·유포하려던 ‘국가범죄’였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책동 같은 사안과도 ..
수많은 부정적 사건과 일화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를 말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명박산성’이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중순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을 막기 위해 광화문 한복판에 설치했던 컨테이너박스 바리케이드를 일컫는다. 시위대가 오르는 것을 막는다며 컨테이너 표면에 칠한 윤활유는 미끈미끈, 뺀질거리는 이명박 이미지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용산 대통령실 청사 1층 로비에 가림막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명박산성을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사 1층 현관에서 기자들과 진행하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하면서 취한 조치였다. 가림막으로 인해 로비에서 출입구 쪽 시야가 차단됐고, 기자들은 윤 대통령이나 참모들의 출입을 파악할..
겨울잠 자러 개구리들이 다 숨어버렸네. 개구리가 없으니 뱀도 ‘인투더와일드 호텔’로 고고. 나도 짱박혀 긴 겨울잠이나 자면 좋으련만 월드컵 기간에다 연거푸 마신 커피에 눈만 말똥말똥. 말동무가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전화기에 대고 사는 얘기를 나누곤 해. 김성동 샘의 단편소설 ‘눈오는 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이가 잠꼬대를 하는 장면. 두루마기 동정에 인두질을 하던 엄마에게 아랫목에서 아이가 그런다. “아부지 오시먼 깨줘야 뎌. 새벽이라두 아부지 오시먼 꼭 깨줘야 뎌.” 밖에 개 짖는 소리가 나서 “누, 누구세유?” 하고 엄마가 내다보니 눈보라가 펄펄. “아부지는 거시기 새 시상을 맨들기 위해서 높은 산을 넘어갔구, 그래서 원젠가는 다시 높은 산을 넘어오실 거라구 그랬잤냔 말여….” 빨치산이 된 아버..
지난여름에 방영이 시작된 예능 프로그램 를 가끔 본다. 프로팀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몬스터즈’ 팀이 고등학생, 대학생, 18세 이하 국가대표팀 등과 시합을 벌이고 있다. 후배들과의 부담 없는 친선 경기가 아닐까 싶지만, 매번 필승의 각오로 치열하게 대결한다. 7할 승률을 목표로 기획되었는데, 결코 만만한 승부가 아니다. 어린 선수들이 ‘대선배’들과 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여느 프로 경기 못지않게 박진감 넘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후배들의 탁월한 플레이에 경탄하면서 한 수 배우는 태도다. 모든 스포츠 경기 자체가 자연스럽게 학습을 수반하지만, 나이와 경험에서 한참 아래인 팀에 패하면서 자기의 약점을 확인하는 모습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
낙타가 죽었다. 죽어서 염라대왕 앞으로 갔다. 알려진 바와 달리 염라대왕은 생사를 결정하는 힘은 없다. 죽은 자에게 지금 처한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줄 뿐이다. “너는 밧줄도 통과하기 어렵다는 바늘귀를 지나서 천국에 이른 첫 번째 낙타이다. 네가 천국에 온 까닭은 아라비아반도의 유목민들이 주장하듯 신의 99번째 이름을 은밀히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이 높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순종하도록 먼 사막으로 이끈 덕도 아니다. 황야를 헤매던 몽골의 부족장에게 네 피를 주어 목숨을 살린 공도 아니다.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몸에 그늘을 만드는 강인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네 어미가 새끼까지 노예로 살게 할 수 없어 일부러 젖을 주지 않은 탓도 아니다.” “어미가 젖을 주지 않다뇨? 무리 속에..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로 추앙받다가 각각 ‘사기꾼’과 ‘빌런’으로 전락한 샘 뱅크먼프리드와 일론 머스크. 이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롱터미즘’(Long-termism)이다. 트위터 인수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뱅크먼프리드의 의사를 머스크에게 전달하며 다리를 놓아주려 했던 사람도 롱터미즘의 주창자인 옥스퍼드대 철학교수 윌리엄 매캐스킬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현재 실리콘밸리의 IT 거부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 사상은 ‘효과적인 이타주의(EA)’라고 불리는 사회운동의 한 갈래이다. EA는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수천, 수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EA에서 파생된 롱터미즘은..
정부는 11월28일 미래우주경제 강국 실현을 위한 6대 정책과제를 포함한 우주로드맵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지난 7월6일 윤석열 대통령은 우주경제 비전을 선포한 바 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모델로 한 ‘우주항공청’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의 우주전담기관이 다양한 기능 및 특성을 갖기 때문에 한국 실정에 맞는 우주항공청 신설에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주항공청은 뉴 스페이스 시대의 국내 우주경제, 국방, 안보, 우주협력과 외교, 우주활용 분야 등을 견인할 컨트롤 타워로서 명확한 기능과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대부분의 정부 부처가 우주개발 및 활용에 관여되기 때문에 우주항공청은 단일 부처 산하가 아닌 대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