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텔레비전을 켜면 화면 오른쪽 상단에 숫자가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프로그램에 담긴 선정성, 폭력성, 잔인성에 따라 시청이 가능한 최소 나이를 나타내주는 숫자다. 남세스러운 장면 잘못 봤다가 우리 애 이상한 짓 할라. 때려 부수는 거 자주 봤다가 우리 아이 성격 나빠질라. 자라나는 이 땅의 꿈나무들에게 가능한 한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담긴 정책으로, 그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이더라도 그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좋은 걸 보고 자라야 좋은 사람 되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만큼은 더 나은 삶으로 끌어올리려는 전 국민적 교육열이, 이 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 해도 아마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바마도 툭하면 한국의 교육정신을 들먹이는 걸 보면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유난스러운 축에 속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상하게도 뭔가 먹을 때만 되면 교육에 대한 이런 섬세한 고려는 깡그리 사라진다. 식사예절이나 편식 교정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얘기다. 식당 바깥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횟집 앞 수조의 물고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아예 하나를 지목해서 “요놈으로 잡아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한다. 물고기가 몸을 돌릴 수조차 없이 꽉 찬 광경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대게와 광어가 물건처럼 포개져 쌓여 있지만 엄마 아빠는 싱글벙글하기만 한다. 고깃집 간판에는 닭, 돼지, 소가 각각 스스로의 살코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입맛을 다시며 엄지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세우고 있다. 먹히는 자가 맛있어 하는 이 괴기스러운 모순은 그저 하찮은 디테일로 식당을 선정하는 데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건 물론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식당 안에서 벌어지는 ‘자극적인’ 장면과 대화다. 산 새우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의 새우를 그 자리에서 껍질 벗겨 먹는데, 녀석들이 튀어 나가지 않도록 수건으로 덮어놓고 하나씩 잡아 꿈틀거리는 걸 그냥 초장에 찍어 잡순다고 한다. 펄펄 끓는 물에 산 채 넣는 경우도 있다. 살려고 바동거리는 새우들이 뚜껑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어른들은 그저 태평이다. 어떤 이들은 소금구이로 먹으라고 파는 새우를 굳이 산 채로 달라고 해서 까먹기도 한다. 토막이 되어 참기름을 더듬는 산 낙지는 너무나 정당하고 소중한 우리의 전통문화라 아예 논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미꾸라지가 끓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도망치도록 해서 만든다는 추어탕도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토록 대놓고 즐기는 살육의 현장에서는 오고가는 대화도 이에 걸맞게 엽기적이다. “새우는 살아서 톡톡 튀는 걸 먹어야 제맛이지!” “역시 갓 잡은 게 맛있어!” 모두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쉽게 드나드는 식당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애들 몰래 찾는 곰쓸개나 개소주까지 갈 것도 없다.
바다를 컨셉트로 꾸며진 신당창작아케이드 내 횟집들 (출처: 경향DB)
한손에 동물 인형을 쥐고, 평소에 <니모를 찾아서>를 즐겨 보던 어린아이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어젯밤 바다용궁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엄마 아빠의 인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살아있는 생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런 식생활과 태도는 벌어지는 매끼마다 아이들에게 생명을 대하는 그릇된 자세를 은연중에 가르친다. 나의 관점에서는 적나라한 포르노를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면서 성교육이 성공하길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국제학계에서는 물고기가 아픔을 느끼는지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이 논쟁의 쟁점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도 아픔을 감지하는 신경조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지만, 아픔에 대해 무의식적인 반사신경 반응을 보이는 것뿐인지, 아니면 진정 의식적으로 아픔을 인지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물고기도 아파한다는 진영은 단순 반사신경이 아닌 행동을 근거로 내세우고, 반대 진영은 물고기가 의식의 핵심인 전뇌피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요 증거로 든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이런 논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물고기의 아픔이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의식적 아픔과 동일해야 아픔으로서 유효한 것은 아니다. 어떤 저차원적인 신경생물학적 수준에서 벌어지든, 뭔가는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고 이리저리 비틀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거면 된 거다. 과학자들의 입장정리와 상관없이, 물고기도 새우도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생명 존중보다 중요한 교육은 없다. 섬뜩한 ‘19금 밥상’에서부터 교육은 시작된다고, 야생학교는 믿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지난 칼럼===== > 김산하의 야생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산하의 야생학교]‘성형 아우성’의 고욕 (0) | 2013.12.11 |
---|---|
[김산하의 야생학교]사람과 생물 ‘먹고살기’의 다양성 (0) | 2013.11.20 |
[김산하의 야생학교]보이지 않는 건물, 훤히 보이는 무지 (0) | 2013.10.09 |
[김산하의 야생학교]오빤 ‘자연 스타일’ (0) | 2013.09.11 |
[김산하의 야생학교]긍정적인 유난스러움 (0) | 2013.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