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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민
산에 갔다 내려올 때 외딴 동네에서 빈집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인적 끊긴 빈집은 오랜 시간 홀로 견딘 자취도 아주 늙었다. 내려앉는 지붕 아래 온기 없는 방. 마당은 시무룩한 풀들의 차지다. 비딱한 마당 입구에서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는 자가 있으니 수도다. 나는 수도꼭지를 보면 틀고 싶어진다. 과연 물은 나올까. 낮은 기대로 손잡이를 돌리면, 놀라워라, 물이 나온다! 수도의 목구멍까지 진출한 뒤 하염없이 대기하다 어렵게 지나가던 이를 불러 콸콸콸 쏟아지는 물. 마른 땅 시든 풀잎을 적시고 힐끗 뒤돌아보며 달아나는 물을 보며 마이크 앞의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 어떤 종류의 말을 입에서 꺼내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있는가.
설경(舌耕)이란 말이 있다. ‘강연이나 변호 따위와 같이 말을 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음’이라고 국어사전은 풀이한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이미 배운 바 있으니 혀로 농사짓는다는 뜻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오늘도 컴퓨터 모니터 안을 쏘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밀봉한 봉투처럼 살고 싶었는데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그만 너덜너덜해진 쏘가리의 입이 된 것만 같다. 자극적인 미끼를 던진 제목에 낚이기가 여러 번이다. 눈만 버린 사진, 생각을 어지럽히는 말이나 글도 많다. 글 읽고 나서는 대개 글쓴이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는데 그들의 빙그레 웃는 얼굴에서 빈집의 수도꼭지를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 입술에 걸린 낚싯바늘 같은 제목과 글들과 함께.
요즘 산에 가면 제비꽃이 많다. 종류도 다양한 제비꽃 하나 없다면 그 산은 이미 빈집처럼 허물어지고 말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중 낚시제비꽃은 남쪽 지방에 흔하다. 그제 부산의 꽃동무께서 앞산에서 찍었다며 보내주어 옛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땅에서 바로 꽃줄기가 올라오고 낚싯바늘처럼 고개가 바짝 구부러지는 낚시제비꽃. 빈집에서 물을 참고 있는 수도처럼 비탈에서 불쑥 솟은 가느다란 꽃대와 그 끝의 묵묵한 꽃잎. 낚시제비꽃, 제비꽃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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