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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넘어가자 드넓은 바다를 향해 자그마한 포구 마을이 고즈넉이 펼쳐졌다. 대정(大靜), 안덕(安德)계곡, 대평(大坪)이라고 쓰인 도로표지판을 따라온 길이었다. 큰 고요, 안락한 계곡, 평평하게 뻗은 들. 눈으로는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좇고, 머릿속으로는 한자(漢字)의 뜻을 새기며 나아갔다. 장미는 어김없이 집 앞에 나와 길모퉁이 쪽으로 목을 비스듬히 빼고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알려준 주소를 향해 길 이쪽 저쪽 집들과 마을의 형세를 가늠하며 코너를 돌던 중이었다. 장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반가움을 압도하는 친밀하면서도 낯선 아득함이 밀려 왔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부산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제주도의 작은 포구마을의 허름한 농가에 장미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이. 집은 마을길에 접해 있는 일자형(一字形)이었다. 바람 많은 섬 날씨에 맞게 지붕이 몹시 낮았는데, 한옥 목수 남편을 둔 덕에 기둥들이 튼실해 보였다. 장미가 준비한 식탁은 조촐하나 화려했다. 복숭아와 참외를 정성껏 깎아 접시에 담았는데, 마치 모란이나 작약처럼 크고 붉은 꽃이 만개한 모양이었다. 참외가 꽃심에 해당하는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장미가 몇 포기 심어 수확한 귀한 것이었다. 한 조각 맛보니, 달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수분에 식감이 좋았다. 다과를 앞에 두고 주거니받거니 담소를 나누었다. 주 내용은 편지로 알고 있던 사실의 세부였다.
제주도_경향DB
사실은 전체적인 윤곽을 전달하고, 세부는 여백과 행간으로 남은 저간의 사정과 느낌을 묘사한다. 장미와 그녀의 남편 한옥 목수는 여행으로 왔다가 그곳 사람들에 의해 자리를 잡은 희귀한 경우이다. 대학에 다니고, 사회에 나가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자력으로 꾸린 장미였기에 여행지의 숙소도 저렴하면서 알찬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들었다. 관광지의 떠들썩한 곳을 피해 고요한 포구에서 며칠 묵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목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포구 사람들이 초대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손보지 못한 곳들을 보여주었다. 목수는 이 집 저 집 고쳐주느라 돌아갈 날짜를 연기하고, 결국은 포구 사람들이 소개해준 허름한 농가에 새살림을 차렸다.
만남이 애틋했던 것처럼, 헤어지려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작은 선물들을 전해주고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장미가 탁자 옆에서 크고 길주룸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뜻밖에도 도마가 들어 있었고, 나는 짧게 탄성을 질렀다. 장미는 목수 남편이 잘라준 제주도 삼나무를 몇날 며칠 손수 깎고 밀고 다듬어 기름칠해 말렸다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장미와 헤어져 포구 끝 바다로 향했다. 백미러로 손을 흔들고 있는 장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크나큰 고요와 안락한 계곡, 평평하게 쭉 뻗은 들. 그곳에서 만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미의 삼나무 도마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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