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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때 절이 있다가 사라져 버린 곳을 폐사지나 절터라고 한다. 그 자리에 다시 절이 들어선 곳도 있고 그냥 빈터로 남아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존하는 절터의 수는 나라 안에 어느 정도가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중 경주의 황룡사지나 익산의 미륵사지처럼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들도 있지만 국보나 보물 같은 석조유물 하나조차 품고 있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곳들이 대다수다.

나는 하필 그런 욕망이 스러진 곳들을 좋아했다. 지금은 그나마 번듯하게 손을 댄 곳들도 많지만 처음 그곳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1987년 당시만 하더라도 그저 폐허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겨우 석조유물 곁으로 가는 길만 다듬고 매만져 출입이 가능했을 뿐 웃자란 덤불에 유물이 덮여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함께 다닌 이들이 있었지만 한두 해 후부터는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공간이든 그곳을 찾을 때 혼자여야 좋은 장소가 있고 여럿이어야 좋은 곳이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절터만큼은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금세 깨달은 것이다.

겨울이 무르익은 이맘때면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에 가기를 즐겼다. 그곳은 당시 불교의 주류였던 화엄종(교종)과 새로운 종파인 선종이 공존한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석탑과 탑비, 석등 그리고 부도라고도 부르는 승탑의 받침돌과 같은 빼어난 석조유물이 남아 있어서 볼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곳에 절터가 있다는 것조차 잘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니 당연히 하루 종일 머물러도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것이 좋았다.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 말이다. 굳이 겨울에 그곳을 찾았던 까닭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석조유물보다 더 좋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좁아터진 골짜기에 벼랑처럼 곧추선 산의 나무들과 햇빛의 유희였다. 마치 극장의 스크린처럼 절터에서 건너다보이는 산비탈에는 하루에 한 차례씩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졌고 해마다 서너 차례, 겨울이 되면 그들이 서로 어울려 노는 장면을 보려고 양양읍에서 새벽밥을 먹으며 식당 주인에게 부탁해 보온도시락에 점심을 담았다. 그러곤 미리 탄 믹스커피를 보온병에 가득 채워 절터로 달려가곤 했다. 겨울의 낮고 짧은 해는 겨우 산등성이를 넘으며 급경사의 산비탈에 매달린 나무들 위로 쏟아졌다. 그 순간 마른 나뭇가지들은 세상 그 어떤 것들보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빛나는 시간은 불과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큼 나에게 보물은 절터의 석조유물이 아니라 반짝이며 환하게 빛나는 나뭇가지들과 햇살이었다.

그저 나뭇가지는 햇살과 만나기 전에는 나뭇가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가 머리 위로 올라서서 그들에게 비추는 순간 산비탈은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너무도 아름답게 변신을 한다. 그맘때면 진짜 극장의 객석처럼 절터는 그늘에 젖어 싸늘한 겨울바람이 아프게 이곳저곳을 찔러댔지만 신비탈의 장관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 장면을 수십 차례 보고 난 후 깨달았다. 세상천지 저 홀로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고 말이다. 절터 또한 마찬가지다. 선림원지의 창건에는 화엄종을 대표하는 해인사의 주지가 시주를 하기도 했지만 창건 후 곧 선종 승려들이 머물렀다. 사실 당시는 화엄의 승려들이 선종을 마귀들이 내뱉는 말이라며 박대할 때이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 있는 사찰의 형태는 조사전의 흔적이나 승탑과 탑비와 같은 석조유물들이 선종 가람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마음이 헛헛해지면 자주 찾았던 절터 중 다른 한 곳은 보령의 성주사지다. 강원도도 그렇지만 서해안의 눈은 소문난 것 아니던가. 눈보라를 맞고 싶을 때면 일기예보를 보고 있다가 툭하면 성주사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묵었던 대천의 바닷가에서 만난 눈은 세로로 내리지 않고 가로로 내리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바닷바람이 거셌기 때문이다. 그런 밤이면 숙소의 창가에 앉아 그 장면을 바라보느라 밤을 꼴딱 새고 부스스한 얼굴로 절터를 찾곤 했다. 

아예 눈을 맞기로 작정을 하였으므로 눈을 맞아도 젖지 않도록 옷과 모자 그리고 신발을 갖춰서 넓지 않은 절터를 돌았다. 한동안 서성이다가 쌓인 눈 탓에 높낮이를 가늠하지 못하여 뒤뚱거리며 넘어져도 결코 서둘러 일어서지 않았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 꼼짝 않은 채 눈 맞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다가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비각의 눈썹만 한 처마 아래에서 어깨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비는 신라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 중 하나인데 비문이 끝나가는 부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교종(화엄)과 선종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을 것이라며 법호를 무염으로 쓴 낭혜화상은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선을 배웠고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운 후 당나라로 건너가 선을 익히고 돌아와 선법을 펼친 이다. 사실 그가 했다는 위의 말을 비문에서 처음 읽었을 때 마치 두껍게 입은 옷 속을 파고들어 온 한 덩이 눈뭉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서늘하게 곤두선 말이 탁하기만 했던 나의 정신을 맑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한 해를 시작하는 이즈음에 선림원지와 낭혜화상의 수많은 말 중 위의 말을 떠올린 까닭은 그 말을 올 한 해 곁에 두고 되새기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채찍으로 삼고 싶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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