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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 방앗간 앞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방앗간보다 크고 높게 자란 나무. 곡식 가마니를 경운기에 싣고 방아를 찧으러 온 사람들은 흔히 그 나무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나락 찧는 것을 기다렸다. 그 나무가 얼마 전에 잘려 나갔다. 더운 봄날에 장정 셋이 엔진톱을 들고 한나절 꼬박 나무를 베어 날랐다. 그리고 이제 그늘 없는 방앗간도 머지않아 헐릴 것이다.
농사짓는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이 때마다 드나드는 곳이 방앗간이다.
나락이나 보리를 찧고, 밀가루를 빻는다. 수수며 메밀 같은 잡곡도 방아를 찧어야 먹는다. 온 마을 한 해 곡식 농사가 방앗간을 거쳐 가야 마지막으로 갈무리되는 셈이다.
나락 거두는 때가 되면 방앗간 앞마당에는 나락 가마니들이 처마에 닿을 듯 쌓이고, 몇 날 며칠 늦은 밤까지 불을 켠 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밀 타작 하는 철에는 흰 밀가루를 뒤집어쓴 자루들이 창고에 줄줄이 늘어선다. 우리 집이 마침 방앗간 옆집이니 아이들마저 방앗간에서 요즘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을 안다. 여기 내려와 겨울 농사로 밀농사를 짓게 된 것도 옆집 방앗간에서 밀 방아를 찧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운 좋게도 방앗간 옆집을 얻은 덕분에 방아를 찧는 일만큼은 남들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저 좀 편한 것으로만 생각했지, 방앗간이 귀한 것이라고는 몰랐다.
게다가 악양에는 그만 한 방앗간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한데 이만 한 시골 방앗간이 남아 있는 마을은 전국을 뒤져도 흔치 않다. 특히 밀이나 보리 방아를 찧고, 잡곡도 무엇이든 가지고 갈 수 있는 방앗간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꽤나 멀리서 밀, 보리, 수수 따위를 싣고 옆집 방앗간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전라도에서도 오고, 경상도 저 반대 쪽에서도 자동차로 두어 시간을 타고 와서 방아를 찧어 간다.
하동 토지길 한산사 전망대에서 바라본 악양 들판_경향DB
심지어 경기도나 충청도에서 곡식 가마를 부쳐서 찧어 택배로 받아가는 경우도 있다. RPC라고 하는 도정공장은 아주 많은 양이 아니면 받아 주질 않고, 집집이 놓고 쓰는 방아기계는 쌀 말고 다른 곡식을 찧기는 어렵다.
그러니 마을 방앗간이 없는 시골 마을은 농사꾼 뜻대로 농사를 짓기가 어렵다. 그저 몇 천 평, 어림해서 농사를 짓는 소농이 수매하지 않는 곡식 농사를 지었다가는 방아도 찧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옆집 방앗간을 허무는 이유는 간단하다. 방앗간 앞 도로 확장. 지금 길은 중앙선이 없는 아스팔트길인데, 이것을 2차선 도로로 넓히는 일이다. 이 길에 차가 얼마나 많이 다니는가 하면, 지하철보다야 더 자주 다니기는 하겠지만, 산불이 나거나 초상이 나지 않는 한 1년 내내 자동차가 열 대 넘게 이어달리는 일이 없는 길이다. 할머니나 아이들이나 경운기 다니는 것이 위험해서 길을 손보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런 길을 확장한다고 돈을 쓰는 중이니, 공사를 하는 관청에서는 방앗간이야 그저 보상금이 조금 더 나가는 건물 정도로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이곳 악양은 다른 곳보다 밀이나 보리 같은 겨울 농사가 많은 편이다. 우리밀 농사를 짓는 곳이 없다고 알려졌던 때에도 밀농사를 짓고 있었고, 정부에서 보리 수매를 그만둔 뒤에도 지금껏 보리농사 짓는 집이 적지 않다.
밀방아, 보리방아를 찧는 방앗간이 두 개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앗간이 있으면 온 마을 농사가 달라진다. 한번에 농사지은 것을 통째로 넘겨야 하는 수매에만 매이지 않고, 농사짓는 사람이 제 형편에 맞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을이 저 알아서 굴러갈 수 있는 힘이 방앗간에서 나온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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