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용산참사, 백남기, 쌍용자동차, 밀양, 강정 대책위 관계자 10여명이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경찰의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앞두고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리였다. 당초 모임 장소는 남영동 경찰인권센터. 하지만 장소는 옮겨졌다. 당사자들이 경찰 근처로 가는 것조차 거부감이 든다고 토로했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 노조간부가 입을 열었다. “경찰을 보면 부들부들 떨려요. 보기 싫을 뿐만 아니라 분노마저 치밀어 오릅니다. 2009년 평택공장 점거 파업 때 물과 음식물을 차단하더군요. 대신 2급 발암물질이 섞인 최루액을 뿌리고, 대테러 진압용인 테이저건을 마구 쏘았어요. 그러고선 진압 때 경찰특공대가 사용했던 기중기 수리비 등 16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파업에 참가했던 동료와 가족..
의료의 권력은 막강하다. 현대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타인의 인신을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사법부와 의료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최근 정신보건법 개정으로 절차가 까다로워지기는 했지만, 정신과 전문의는 환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환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의료의 권력이 정신병원 강제입원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의 의료 이용 전반에 걸쳐 행사되고 있다. 의료의 권력이 보편적으로 확립된 것은 20세기 초 이후에 형성된 현상이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의료 이용의 중심 공간은 병원이 아니었다. 빈민층은 수용소와 다름없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중산층 이상의 환자는 의료인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치료를 받았다. 의료인이 환자를 통제할 수 있는 여지는 ..
갖은 악행으로 지난여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1심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됐다. 검사직을 수백억원대 부정축재 수단으로 활용하고도 계속되는 거짓 해명으로 시민들의 공분을 샀던 점에 비하면 형량이 너무 낮다. 법원은 진 전 검사장이 김정주 넥슨 대표에게서 공짜로 받아 120억원의 차익을 거둔 주식이 뇌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직무상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재판부가 과연 한국 사회에서 검사가 갖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는지 의심스럽다. 특히 진 전 검사장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최측근으로 검찰 내 실세였다. 김정주 대표는 검찰에서 진 전 검사장에게 주식을 준 것이 ‘보험’이었다는 취지의 진술도 했다. 진 전 검사장과 한 식구였던 검찰은 징역 13년에 추징금 13..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믿었다. 김주열의 피로, 경무대 앞에서 쓰러진 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이뤄졌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 많은 열사들의 피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자유를 위해 비상해 본 사람이면 안다. 자유에는, 민주주의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는 걸. 어느새 아득한 시절이 돼 버린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학교엔, 거리엔 화염병과 최루탄, 쇠파이프와 곤봉이 난무했다. 그걸 당연시했다. 이렇게 온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요즘은 민주주의가 촛불을 먹고 자란다. 100만명, 200만명이 촛불을 들고 권력자를 쫓아내려는 집회와 행진을 이어가지만 경찰과의 충돌은 없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엔 지금 박..
평소에는 올려다보기도 힘들 만큼 고압적인 광화문이 그토록 처연한 모습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귀를 때리는 스피커의 울림이 멀리 보이는 화면과 전혀 맞지 않는, 각자의 외침과 노랫소리가 100만, 혹은 200만의 인파와 함께 뒤엉기는 혼돈 속에서 문득 치밀어 올라온 것은 깊은 서러움이었다. 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광장을 메운 낯선 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도 이런 서러움이며, 그들도 지금 목이 메고 있을까. 문득 스피커에서는 ‘길가에 버려지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광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는 강력하나 일시적이고 이토록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토록 철저하게 질서있고, 차갑도록 뒷정리에 신경을 쓰며..
미국의 사회학자 랄프 키즈는 2004년 사회생활에서 진실과 신뢰가 실종되어 부정직과 기만이 판치는 점에 주목해 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진실 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춰 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롬니는 ‘진실 뒤의 정치’ 수법을 구사하며 오바마를 비판했다. 이것은 2016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후보가 행한 여러발언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2016년 영국에서 유럽연합(EU) 탈퇴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탈파는 ‘진실 뒤의 정치’를 내걸어 일정한 지지를 얻었고 관철됐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짓이 남길 후과를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완벽한 거짓은 완벽해 보이는 진실 뒤에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진실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진실이..
국가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국가의 행위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웠던 사회계약설의 개념이다. 사회계약설은 계몽사상의 핵심 논리로 근대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구태여 사회계약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적어도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서 그런 믿음을 저버리는 국가의 행위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가’의 이름을 내세운 정치권력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이 그러했으며, 3대 세습체제인 북한도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행위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우리..
일요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백남기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백남기씨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은 뒤 중태에 빠져 316일 동안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오고 있었다. 경찰이 서울대병원의 모든 출구를 봉쇄했다는 소식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검찰이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강제로 침탈할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올라왔다. 시신을 부검하려는 이유는 뻔하다. 물대포를 맞아서 죽은 게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거다. 수술할 때 이미 담당 의사들이 외부 충격에 의한 출혈이라고 진술했는데 뭘 부검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수많은 시민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을 보지 않았는가.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그렇게 직사했는데 어떤 사람이 버텨내겠는가. 무엇보다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