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공사재개’라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청와대는 활짝 웃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지혜롭고 현명한 답” “숙의민주주의의 모범” “통합과 상생의 정신”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그러나 닷새째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기원 108배를 마치고 오신 밀양 송전탑 피해 주민들은 울고 계셨다. 볕에 잔뜩 그을린 피곤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며,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져갔다. 공론화위원회의 보고서를 살펴보면서 밀양 주민들의 눈물이 떠올랐고, 깨달았다. 보고서에 ‘숫자’는 있었지만 ‘사람’이 없었다. 시민참여단에 제공된, 객관성 담보를 위해 최대한 수치화된 자료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핵발전소로 삶이 해체된 사람들, 송전탑으로 삶이 뽑혀버린 사람들, 현장에서 피폭노..
오늘은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지난 7월24일 출범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시민참여단의 최종 의견을 담은 대정부 권고안을 정부에 전달하고 3개월간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3개월간 진행된 공론화 과정은 에너지정책의 역사를 새로 쓴,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이제껏 소수의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에게 맡겨져 있던 원전정책 결정 과정에 일반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창을 열었다. 오리엔테이션 95.6%, 합숙토론회 98.5%란 높은 참석률은 시민참여단의 높은 사명의식과 참여의지를 보여준다. 언론은 공론조사의 ‘후폭풍’을 우려하지만, 참여자들은 숙의 과정에 상당히 만족하면서 어떤 결론이 나든 치열한 학습과 토론의 결과인 만큼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시민으로서의 존재 가치와 의..
저는 밀양 송전탑 경과지 마을인 상동면 여수마을에 사는 61세 김영자입니다. 저는 평생 농사를 지은 농사꾼입니다. 저는 데모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저를 보고 데모꾼이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서명 받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앞선 사람들이 물러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제가 맨 앞에 서서 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반대 주민 150가구는 지난 12년 사이에 두 사람이 목숨을 끊고, 수백명이 경찰서, 검찰청, 법원을 드나들고 철탑도 다 섰지만,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지금도 합의하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막는 일입니다. 왜냐고 물으면 저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한국전력 사장님이 ‘신고리 5·6호기가 없으면 밀양에 765㎸ 송전탑은 필..
며칠 전 가까운 교수 한 분이 재미난 그림 하나를 보여줬다. 이정문 화백이 1965년에 그린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란 제목의 그림이었다. “앞으로 35년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달라질까”란 부제를 달고 있었다. 1965년이라면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태양열을 이용한 집, 전파신문(오늘날 전자신문), 컴퓨터, 전기자동차, 움직이는 도로(요즘의 무빙워크), 소형 TV 전화기(영상통화 가능한 휴대전화), 청소 도우미 로봇, 원격진료, 원격학습 등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기기와 설비, 서비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단 하나 지금과 다른 건 로켓을 타고 달나라로 수학여행 가는 상상뿐이었다. 만화가인 이정문 화백이 어떻게 그렇게나 미래를 잘 맞힌 그림을 그..
지난 8월25일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가 시작되었고, 공사 재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뜨거워지고 있다. 경제성은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정당화에 동원되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다. 그러나 경제성은 안전성을 전제로 한다. 생명을 잃는다면 돈이 소용없듯이, 안전성이 없으면 경제성도 의미가 없다. 한데 찬반 양측은 신고리 5·6호기의 안전성에 대해 입장이 정반대다. 공사 찬성 측은 한국형 3세대 원자로 APR1400을 채택한 신고리 5·6호기는 안전성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며, 특히 방사성물질의 외부 누출을 막아줄 콘크리트 격납건물은 규모 7.0의 지진에도 견디며 손상 확률은 100만년에 1번 미만이라고 주장한다. 공사 중단 측은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원전의 중대 사고는 여전히 발생 가능하며, 체르노빌과 ..
기후변화, 핵 위협, 환경파괴, 질병, 인권탄압, 기아 등은 한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전 지구적인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죠.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합니다. 그동안 지구, 인류, 문명과 같은 근본적인 가치는 가려졌죠. 세계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성장했지만, 자원감소와 환경파괴가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패턴의 성장은 오히려 성장여력을 감소시켰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세기 전,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 요지입니다. 민주주의는 어떨까요. 이전에 비해 더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정책이나 현안을 결정할 ..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고, 신고리 5·6호기의 공사중단 여부를 공론조사로 결정할 방침을 세우자 원전세력이 똘똘 뭉쳐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수십년간 독점했던 ‘전문가의 식견’을 앞세워 한국 원전의 기술력과 경제성이 세계최고라는 등의 원전지상주의를 원전지식이 부족한 시민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학계의 핵심학맥인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출신이자 한국수력원자력에서도 13년간 근무했던 박종운 교수(동국대)의 ‘원전 비판’이 눈에 띈다. 원자력계는 “세상에 이런 마피아가 없다”는 박 교수의 자아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 교수는 “가뜩이나 원전밀집도가 높은 부산·울산·경주 인근에 또다시 신고리 5·6호기를 짓겠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월성원전 주변엔 150만명, 고리원전 인근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놓고 찬반논쟁이 뜨겁다. 탈원전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시민 배심원단이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을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탈원전을 비전문가들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까? 우리 시대의 과학은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은 중세 이후 온갖 그릇된 믿음을 격파해오며, 종교가 차지하는 위상에 버금가는 위치에 올랐다. 왕이 스스로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왕의 권리는 과학적 사실 앞에 상처를 입었다.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말할 때, 이는 믿을 만하다, 신뢰할 만하다고 해석된다. 과학의 위상은 올라갔지만 사회는 과학적으로 굴러가지 않고, 인간도 과학적으로 살지 않는다. 이는 과학이 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은 어떤 사실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