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선(善)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다. 애초에는 착했는데 성장하면서 악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든지 인의예지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리 차가운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잠시라도 가엽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 생기곤 하고,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몰래라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을 갖기 마련이다. 특히 수오지심은 사회가 정당하고 건강하게 유지되는 근간이 된다. 우리가 흔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도 수오지심의 발현이다. 수오지심을 달리 표현하면 ‘창피한 줄 아는’ 마음이고 (불의를) ‘참을 수 있는’ 자세이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난 21일 저녁 예멘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던 난민 하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를 다쳐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어둠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던 제주 초여름의 해도 저버렸다. 바깥에 있던 다른 난민들이 하나 둘씩 방으로 들어와 대화에 동참했다. 통역을 담당한 예멘인까지 포함하면 모두 6명의 ‘젊은 아랍 남성’들이 방 안에 함께 있었다. 여성은 내가 유일했다. 순간 나는 위축됐던 것 같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낯선 이방인 남성들이 다수가 되자 실제 이들이 내게 위협적인지 여부와 관계 없이 마음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예멘에 두고 온 가족,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온전했던 삶에 대한 그리움, 예..
미국 유학 시절 만난 친구 중 한 명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출신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역사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친구는 도서관 컴퓨터로 자신의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죽어가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나는 무지와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었다. 제국의 심장에서 적대세력들과 대면해야 했던 그에게 일상은 전쟁터였다. 남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걱정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분노했으며, 양국 정부로부터 검열당하고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계층적 특권으로 자신만 ‘안전한’ 공간에서 ‘한가롭게’ 공부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팔레스타인 출신 무슬림 여성은 인종과 국적, 종교, 젠더 질서가 만들어내는 교차적 억압 체계에서 또 다른 위험과 ..
예멘 커피는 커피 애호가들이 최고로 꼽는 커피 가운데 하나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하와이안 코나, 예멘 모카를 묶어 ‘세계 3대 커피’라 부르기도 한다. 호되게 값이 비싼 블루마운틴이나 코나 커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접근할 만한 가격이어서 가끔 마시곤 한다. ‘모카’는 커피를 수출하던 예멘의 항구 이름인데, 우리가 익히 아는 에티오피아 커피들도 이 항구를 통해 수출을 해서 같은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수출하던 커피가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모카’는 아예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예멘 모카가 가진 진한 초콜릿 맛을 재현하려고 커피에 초콜릿, 코코아를 넣다가 아예 초코 맛을 내는 식음료에 모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달달한 카페모카는 예멘 모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코코아시럽을 듬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