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계셨던가요. 당신이 이승의 삶을 마무리하고 산 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의례에서 당신은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선생님이라고 불렸습니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전개되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호칭도 변화해 왔습니다. 초기에 당신들은 피해자라는 당연한 호칭조차 얻기가 어려웠지요. 1945년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이름 없는 피해’를 안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1990년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면서 당신들은 피해자로, 눈물짓는 한 많은 피해자로 우리 역사에 균열을 내며 등장하였지요. 그동안 식민지역사를 누구의 입장에서 써 왔는지, ‘과거청산’이란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가와 여성시민의 관계는 무엇인지, ‘할머니’와 현세대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당신들은 우..
#1. 2018년 8월30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12·28 한·일 정부 간 합의엔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되지 않았고, 그 해법이 2차 세계대전 이전과 도중에 군에 의해 이뤄진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에 대해 (정부의) 명백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에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위안부’ 문제는 유엔 위원회에서 다룰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런 권고가 계속되면 위원회 존재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 ‘협박’한다. #2. 2015년 한·일합의의 부산물인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정부가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당사자인 김복동 할머니는 8월31일 외교통상부 청사 앞에서 즉각 해산을 요구하는 1인 시..
지난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에 참석했다.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희정 무죄” 소식을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고 동승한 여성들도 술렁거렸다. 이번 재판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력 인사의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답’이기도 하고, 김지은씨가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른 미투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위력(威力)에 대한 인식이다.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경험한 위력의 정도가 의사 표현을 불가능하게 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여성을 포함해 많은 이들도 “피해자가 성인이고, 가해자 행동에 대해 자기주장을 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왜 그런 관계를 ‘유..
평남 남포 출신 박영심 할머니. 1938년 3월, 그녀는 일제의 ‘처녀 공출’에 걸려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중국 난징에서 3년을 보낸 뒤 미얀마의 라시오, 윈난성 쑹산(松山) 등의 위안소를 전전했다. 6년 동안 많은 날은 하루 30~40명씩 일본군을 상대했다. 1944년 9월,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연합군 포로가 됐다. 그녀는 미군의 신문에 게재된 위안부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 속의 여인은 만삭이었다. 2000년 그녀는 “사진 속 여인이 나”라고 밝혔다. 또 난징과 윈난의 옛 위안소에 가서 “내가 여기에 있었다”고 외쳤다. 2015년 난징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옛터에 기념관이 들어선 데는 그녀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기념관 마당에는 임신한 위안부의 동상이 세워졌다. 충남 논산 출신 송신도..
선명하지 못한 흑백 화면 속, 커다란 구덩이에 여성 시신 수십 구가 버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불과 19초에 지나지 않는 영상이지만, 정의를 요구하며 수십 년간 계속된 투쟁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중국 윈난성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상은 1932년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지속된 일본군 성노예제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영상은 2018년 2월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공개한 이후 전 세계 언론에서 널리 보도됐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자국의 전쟁 기록에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보상 문제에 대한 합의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잔혹행위가 자행됐다는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잔혹행위, 특히 여성에..
현재 상영 중인 영화 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김군자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귀국한 뒤에도 잊혀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으로 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괴로움과 증언이 담겨 있다. 1991년 8월, 과거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를 증언한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화제가 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과거 역사사실에 대해 사죄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는 일본 혐한론자들의 발언들이 일본의 최대 유력 종합월간지인 ‘문예춘추(文藝春秋)’ 1992년 3월호에 특집대담 기사로 실렸다. 기사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역사 등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반(反)과 혐(嫌)의 감정을 분출시키는 ..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맘때쯤 신년회가 있었다. 예약한 중국집이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오후 5시45분에 전철역에서 모여 가기로 했다. 5시35분쯤 도착하니 개찰구 앞에 상당수가 있었고, 5시44분에 마지막 멤버까지 40여명이 모두 모였다. 당시 어느 변호사단체의 옵서버이기도 했다. 여름 총회에서 2년 임기 회장을 새로 뽑았다. 이날 이사진이 모여 2년치 이사회 날짜도 정했다. 수첩들을 펼쳐 약속이 없는 날짜를 맞춰 가는데, 다다음해 봄의 약속이 잡힌 사람이 여럿이었다. “조센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 시절 동네 술집 옆자리에서 들려온 얘기다. 나의 변변찮은 일본어를 알아채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역사와 정치를 시비하려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올해 한국에..
애당초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위안부 문제가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설치로 한·일 간 외교갈등 사안으로 재부상했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0% 이상이 위안부 합의의 무효화나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고, 주요 대권주자들도 합의에 부정적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를 실행하는 게 나라의 신용 문제’라며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차기 정부도 압박하고 있다. 12·28 위안부 합의를 쫓기듯 졸속으로 결정한 지도자의 시대적 의제에 대한 통찰력 부족, 그리고 인간의 존엄 특히 여성의 존엄을 지켜주지 못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여론도 비판적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성의있는 이행’ 압박에 위안부 문제가 국내 정치 이슈로 재부상한 것이 다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