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 틀림없어. 평일 아침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배낭을 멨다. 게다가 버스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분명 간첩이야. 저걸 어떻게 신고하지? 가다가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야겠다.’ 1970년대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6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아홉 먹은 멀쩡한(?) 청년, 게다가 버스 운전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모는 삼화교통 333번 버스에, 어릴 적 반공 세뇌 교육으로 배운 그런 간첩 행색의 남자가 탔다. 나는 룸미러로 그자를 훔쳐보면서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파출소에 버스를 대고 얼른 뛰어가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조사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요..
불과 보름 전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수사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던 검찰이 금명간 박 대통령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순실씨 비위에 관한 언론의 잇단 보도와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100만 촛불 민심이 검찰 수사를 견인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여전히 억지춘향 격으로 수사에 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을 참고인 신분으로 규정한 게 단적인 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 규명보다는 박 대통령에게 가벼운 혐의를 적용해 하루빨리 사건을 털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검찰 주변 얘기를 종합하면 검찰은 청와대와 최씨가 재벌·대기업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에 총 774억원을 거둬들인 행위에 대부분 뇌물죄가 아닌 직권남용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직권남용죄는 재단 설립 과정에 재벌..
대통령이 물러나면 헌정(憲政)이 중단되는가? 대통령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물러나는 소위 하야든, 탄핵을 받아 물러나든, 두 경우 모두 헌정중단은 아니다. 헌정은 쿠데타 등에 의해 헌법과 법의 적용이 멈출 때 중단된다. 대통령이 물러나더라도 국가작용이 헌법과 법에 따라 행해진다면 헌정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헌정이란 입헌정치, 즉 헌법에 의거한 정치다. 따라서 근대 헌법의 핵심인 국민주권주의, 법치주의, 기본권 보장, 그리고 권력분립의 원리가 지켜지는지가 헌정 계속의 판단기준이 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닌 최순실의 뜻에 따라, 법과 절차를 어기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치를 함으로써 헌정이 파괴되었다. 지금까지 대통령 본인이 담화를 통해 인정한 것이나 여러 언론보도,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선출된 국가권력인 대통령이 공적 절차 없이 사적 인연으로 그 권력을 사적 개인들에게 위임한 것이다. 국가권력의 사적 소유에 맞서는 좌우파의 공적 분노가 다시금 시민혁명으로 폭발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퇴진’이 이 시위의 일차 목표다.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목표를 이룬 그 다음의 준비도 필요하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그 다음에 약했다. 4·19혁명은 5·16쿠데타를 막지 못했고, 1987년의 민주혁명은 5년 단임의 직선 대통령제로 환원되었다. 대안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설계할 실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정치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도 현저히 부족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성이 실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