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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능력주의(meritocracy)’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뜨겁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능력주의를 내세움으로써 논쟁의 확산에 기여한 점은 있지만, 사실 논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다. 지난해에 출간된 <능력주의와 불평등>이란 책이 그런 논쟁의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10명의 필자가 참여한 이 책은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능력주의를 심도 있게 비판한 탁월한 작품이다.

나는 그간 능력주의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는데, 내 입장 역시 단호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능력주의와 관련된 ‘갈등’이나 ‘사건’이 터졌을 땐 좀 다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론적이고 일반론적인 비판을 현실 세계의 개별 사례에 곧장 적용해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능력주의의 철저한 지배하에 살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시험 공화국’이 아닌가. 그게 잘못됐다고 비판할 순 있지만, 그런 비판이 이미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능력 겨루기 경쟁’의 공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나타나긴 하지만, 압축성장을 겪은 한국에선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능력주의 비판을 균일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능력주의는 한때 세습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이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계급 역시 세습되며 계급이 개인의 능력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 모두 이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능력 겨루기 경쟁’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능력주의에 대해 맹공을 퍼부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책에 그런 고민이 잘 녹아 있다.

능력주의는 원인이 아닌 증상
서둘러 포기 말고 해법 찾아야
그러기 위해선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 같은 사회적 보상
즉 불평등의 크기를 줄여나가는
여론을 확산시켜 나갈 필요성

미국이건 한국이건 능력을 제조하거나 결정하는 최고 공장은 바로 대학이다. 대학입시는 응시생 개인과 더불어 응시생의 가족이 동시에 참전하는 계급전쟁이다. 이런 전쟁의 살벌함을 넘어서기 위한 샌델의 대안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1969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에 존재했던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추첨제의 결합이다.

예비고사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이었다. 일단 이 시험을 통과해야 각 대학의 본고사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1974년부터는 예비고사 성적이 대학 본고사 성적과 함께 입학시험 성적에 반영되었지만, 1973년까지는 통과 여부만 중요할 뿐 성적은 알려주지도 않았다. 샌델은 바로 이런 유형의 시험을 실시한 후 대학 본고사는 추첨제로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는 “이 대안은 능력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만 합격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본다. …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토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되찾아줄 것이다.”

이 대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꽤 그럴듯하다고 보시는가? 아니면 초라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고 보시는가? 최소한의 능력주의를 수용하면서 타협책을 찾아보려는 샌델의 고민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큰 설득력을 얻긴 어려울 것 같다. 예비고사라는 능력주의에 대한 반발도 있겠지만 예비고사를 통과한 응시생들의 추첨제에 대한 반발이 더 거셀 것 같다. 세상이 확 바뀌어 모든 선출직 공직자를 추첨으로 뽑는 ‘추첨 민주주의’가 도입된다면 모를까.

대안이 없다고 해서 비판을 멈출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능력주의의 수요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30세대에서 능력주의 지지도가 비교적 높은 것은 기존의 ‘능력 겨루기 경쟁’이 공정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주로 ‘능력 겨루기 경쟁’ 자체가 구조적으로 불공정하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구조의 한계를 인정하는 선에서 보더라도 불공정한 일이 너무 많이 자행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기업 입사 시 응시자의 출신 학교에 등급제 서열을 매겨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 차별하는 게 능력주의인가? 아니다! 그건 능력주의가 아니다. 기업이 명문 학교를 나온 사람이 우수할 것이라는 ‘통계적 차별’을 암묵적으로 저지르는 것까지야 막을 순 없다 치더라도 채용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밝힌 합리적인 기준과 절차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이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응시자들이 외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능력주의다.

도널드 트럼프는 “나는 덜 배운 사람들을 사랑한다”며 ‘반(反)능력주의’를 자신의 대선 전략으로 삼아 큰 재미를 보았지만, 한국에서 이런 선거 전략이 먹힐 거라고 보긴 어렵다. 한국과 미국의 능력주의 양상이 좀 다르다는 뜻이다. 한국처럼 시험에 의한 공채 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아니 발달할 필요가 없었던 미국이나 영국에선 meritocracy를 학벌주의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 온 한국에선 능력주의가 학벌주의를 넘어서자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용법이 옳건 그르건, 그런 현실이 능력주의 비판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의 대안이나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수년 전 발표한 논문에서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법”이라며 민심 또는 여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능력을 무엇으로 보건, 어떻게 평가하건 능력 격차에 따른 사회적 보상, 즉 불평등의 크기를 줄여나갈 걸 요구하는 여론을 확산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범 교육평론가가 지난 6월10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는 칼럼에서 비슷한 주장을 한 걸 보고 반가웠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결국 해법은 ‘지위의 격차’, 즉 결과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에서 나온다. 이 지점에서 진보는 실패했고, 여기서 공정 열풍과 이준석 신드롬이 싹튼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능력주의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진보를 무덤으로 재촉할 뿐이다.”

“그대가 말한 능력주의는 쉽게 말해 1등만 살아남는 사회를 추구하자는 것”을 비롯해 이 칼럼에 달린 몇 개의 비판 댓글을 보고서 어이가 없었다. 칼럼을 읽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마지막 두 문장이 거슬려서 반감을 표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진보 정치세력이 결과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에 실패해놓고 불평등의 ‘원인’이 아닌 ‘증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강한 이의 제기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의한 ‘서민 약탈’은 능력주의와 무관한 게 아니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에 동원되지만, 우리가 분노하면서 타격해야 할 지점은 불평등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거시적 공정’과 ‘미시적 공정’이 충돌할 때에 ‘미시적 공정’을 외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거나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2030세대의 항변처럼,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신봉자나 지지자들에겐 그들의 능력을 칭찬해주면서 더불어 같이 살면 안 되겠느냐고 부드럽게 설득하는 게 좋다. 이들까지 지원 세력으로 끌어들여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이 능력주의의 폐해에 대처하기 더 쉽거나 나은 해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능력주의 체제하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지만, 정직한 말은 아니다. ‘능력주의’보다는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들어맞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에게 자본주의 비판은 위험하지만 능력주의 비판은 안전하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의 능력주의 비판은 겸양의 표현이겠지만, 지금과 같은 식의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2030세대의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능력주의는 증상이지 원인은 아니다. 서둘러 포기하지 말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우리 모두 애써보자.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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