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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과 물이 다투는 남녘 바닷가. 지난여름 치열했던 땡볕을 바다는 솥처럼 속으로 잘 갈무리했다. 이제 그 온기를 풀어놓으니 벼랑 끝의 바위에도 신축년의 봄기운이 낭자하다. 해금강이 환히 보이는 거제 우제봉. 그 어느 곳에도 하나 뒤질 것 없는 높이와 깊이가 팽팽한 평형을 이루고 있다.

남해의 훤칠한 상록수들이 늠름히 기지개를 켤 때, 멀리 낮은 섬들도 겨우내 웅크렸던 자세를 푼다. 바다에서 막 올라오는 공룡이 한 발을 파도 사이로 내밀며 기회를 노리는 듯한 바위 해안선. 동백꽃으로 장식된 초록터널을 통과하는데 발길을 붙드는 풍경 하나가 있다. 가뭄이나 농약을 살포할 때의 물을 보관하는 대형 물통. 아무렇게나 휙 갖다 놓을 수도 있겠으나, 그 품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쪽빛 바다를 빼닮은 물통의 밋밋한 껍질에 단정한 글씨들.

자연은 이렇게 어김없이 꽃을 내걸고 향기를 풍기고 벌레를 꿈틀거리게 하는데 여기에서 이곳을 대표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발동을 건 것일까. 나무들에게 물을 길어다 준 그이가 이에 필적하는 걸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파도와 바람 소리에 귀를 씻는 이 고독의 복판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랬던 그가 마침내 무르익은 시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이름에 달통한 그이가 이제 자연을 사무치게 매만지는 한 방법이었다.

액자나 책받침에 쓰인 것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 작품은 모두가 아는 두 편의 시였다. 소월의 ‘진달래꽃’과 윤동주의 ‘서시’. 누구는 시를 짓고, 누구는 시를 읽는다. 이렇게 시를 쓰고 공중에 시를 걸어놓는 저 시심의 소유자야말로 시로써 시를 사는 사람. 생달나무, 육박나무, 다정큼나무, 후박나무, 침식나무 등이 어울린 아래 나무의 심장인 듯 동백의 붉은 꽃이 팔딱팔딱 뛰고 있다. 이 봄에 동백이 없는 걸 무어라 해야 할까. 바다에 소금이 없는 것이라 할까. 나에게 너가 없는 것이라 할까. 우리 가슴에 시가 없는 것이라 할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후끈 봄빛에 저 구절을 얹으며 벼랑으로 바싹 나아갔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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