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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전세 난민’을 탈출하게 됐다는 소식이 또 한번 화제가 되고 있다. 현 정부의 새 임대차법 중간에 끼어 오도가도 못하게 된 사연이 국정감사장에서 알려진 이후 홍 부총리의 전세난은 꽤 오랫동안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돼 왔다. 서울 마포 전셋집은 주인이 들어와 비워줘야 하고, 소유하고 있는 경기 의왕 아파트는 세입자가 갱신권을 청구하며 안 나가겠다고 하는 상황이었는데, 최근 세입자가 마음을 바꿔 아파트를 팔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자승자박”이라는 조롱에 이어 “자기 집 팔 수 있게 됐다는 게 대체 뉴스거리냐”는 비판이 나온다. 한 달여 전만 해도 전세난이 곧 진정될 수 있다고 낙관했던 그가 전세문제 해결 난망을 실토하며 빠르게 해결되기 어렵다고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정책 당사자가 되고서야 전세난을 겪는 수많은 서민들의 절박한 마음을 조금쯤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정치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보통 시민들의 삶, 희로애락을 모르고는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전통시장과 지하철은 선거철에만 ‘서민체험’이 앞다퉈 벌어지는 경연장이 된다.
몇 달 전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가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을 당시, 쏟아지는 관련 기사들 속에서 시선이 꽂혔던 건 ‘지하철’이라는 단어였다. <류호정 “국회는 일터, 전철 타고 7시 전 출근 … 꼰대정치 깨려면 청년답게”>라는 제목의 한 인터뷰에서 류 의원은 너무 이른 출근시간이 미안해서 수행비서 차를 이용하지 않고, 전철을 타거나 함께 사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자가용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며칠 후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도 류 의원은 차가 막힐 것 같아서 지하철을 4번 갈아타고 방송사에 왔다고 했다. ‘나처럼 지하철 타고 다니는구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국회의원들과 장차관 등 소위 사회지도층 중 지하철이나 버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교통카드 찍는 법을 몰라 쩔쩔매고, 지하철 승차권 발매기에 1만원 지폐 두 장을 한 번에 억지로 욱여넣고, 버스 요금을 묻자 70원이라고 30년 전 요금을 대답하는 각종 ‘지하철 체험의 현장’들은 이제껏 국민들의 정치 냉소를 키웠다.
‘기분 좋은 놀람’을 안겨줬던 외신 몇 가지를 소개한다. 20년 넘게 동네 단골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해외 주요 언론은 물론, 국내 한 일간지도 큼지막하게 보도한 적이 있다. 독일에 사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몇 달 전 화장지와 와인, 비누 등을 카트에 담고 카드로 계산하는 총리의 ‘코로나 장보기’ 기사들을 보내줬다.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 커플은 코로나19 거리 두기 지침 때문에 카페 입장을 거부당했다가 일반인과 똑같이 규정을 지켜 나중에 입장한 사연이 알려지며 박수 받았다. 지난해 뉴질랜드를 방문한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를 총리가 직접 픽업해 운전하면서 함께 ‘보헤미안 랩소디’를 흥얼거리고, 자신을 알아본 옆차 운전자에게 창문을 내려 인사하고, 집에서 소시지를 구워 먹으며 담소하는 유튜브 동영상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최근의 총선 압승 뒤엔 이 같은 소탈한 소통의 리더십이 있었을 것이다. 자전거 출퇴근으로 유명한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지난 5월 코로나19 봉쇄령을 따르느라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며 오히려 정책 신뢰도를 높였다. 2년 전 정부청사 건물에 들어가다 커피를 쏟자 직접 대걸레질을 했고, 이를 지켜본 청소노동자들이 박수치며 응원한 유튜브 영상은 지금 봐도 흐뭇하다.
입만 열면 민생을 외치는 정치권이 한창 띄우고 있는 신개념 부동산 대책은 ‘중산층도 살고 싶은 질 좋은 공공임대’다. 처음 머리에 스쳤던 생각은 ‘정치인, 권력자들의 가족, 자녀들이 과연 이곳에 살고 싶을까’였다. “○○ 자녀가 이 학교 다닌대” “○○가 이 아파트 산대”라는 입소문이 최고의 광고다.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가족이 스스럼없이 임대주택에 살고 공교육을 함께 받고 돌봄교실, 공공의료를 함께 이용한다면 따로 정책을 홍보할 필요도 없다.
“가끔 지하철 타다 보면 나는 냄새 있어.” 영화 <기생충>에서 성공한 IT기업 사장 동익이 운전기사 기택에게 묘한 냄새가 난다면서 하는 말이다. 영화에서 냄새는 계층의 상징어로 사용된다. 운전기사가 모는 승용차에서 나와, 지하철 냄새 나는 정책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국민 다수의 일상을 반영한 국민을 닮은 정책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게 정치의 첫걸음, 아니 정치의 모든 것일지 모른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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