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변절을 목도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민주당이 지난해 4·7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 올해 3·9 대선, 6·1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패한 것도 등 돌린 사람들의 빈자리가 컸기 때문이다. 더 나은 정치의 주체가 될 줄 알았으나, 기득권으로 전락한 86세대에 대한 2선 후퇴 요구가 이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믿음에 대한 배신은 뼛속 깊숙이 새겨진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민주당에서 마음 떠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넌 나에게 배신감을 줬어.”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 실정의 수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슬로건인 ‘공정과 상식’의 앞 글자를 떼어내면 ‘공상’이다. 정책 혼선, 인사 실패, 배우자 관련 비선 의혹 등이 끊이지 않으면서 윤 대통령이 장담했던 ‘나라다운 나라’는 한낱 공상이 됐다. 이쯤 되면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들릴 법도 한데, 민주당에 대한 시선은 차갑다. 오만·위선·내로남불에 대한 ‘무사과’는 민주당을 ‘무감동’한 정당으로 만들었고, 민심의 ‘무관심’을 초래했다. ‘공상 정권’과 ‘3무 야당’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됐고,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은 가실 것 같지 않다.
8·28 전당대회도 기대에 못 미친다. 당선이 확실시되는 이재명 후보는 대선에서 패한 후 계속 명분과 어긋나게 움직였다. 자숙의 시간을 갖지 않았으며, 비교적 쉬운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전대에 나섰다. 셀프 공천, 당헌 개정 논란에도 휘말렸다. 이 후보가 사법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고 대표에 출마했다는 ‘방탄대표론’ 논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후보는 “모든 영역에서 모든 방향에서 최대치의 공격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검찰의 부당한 정치적 수사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 후보와 관련한 각종 의혹은 언론이나 여당보다 친문 의원 등 민주당 내 반대편에서 더 많이 제기했다.
86세대를 대체한다는 97세대는 존재감이 약하다. 젊다는 것 외에, 97세대가 정치행로에서 특별한 대의명분을 쌓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민심과 멀어지는 동안 이들은 간헐적으로 쓴소리하거나 대체로 침묵했을 뿐이다. 박용진 후보는 이 후보를 겨냥해 “반성하지 않고 국민을 탓하고, 언론을 핑계 삼아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왜 민주당이 여당일 때 이런 쓴소리를 공개적으로, 꾸준하게 하지 못했나. 97세대를 새바람으로 보는 것은 민주당 내부의 시각일 뿐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진정성 있게 사과하지 않는 민주당의 태도다. 지난해 보궐선거에 참패한 뒤에는 언론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며 언론중재법 통과를 시도하고, 대선에서 패한 뒤에는 정치보복을 막겠다며 ‘검수완박법’의 국회 통과를 강행했다. 남 탓과 갈라치기는 여전하고, 당의 외연을 좁히는 데 한몫했던 강성 지지층 입김도 그대로다. 이 후보는 ‘당원들이 의원들을 공개적으로 욕하는 플랫폼’을 만들자고 했는데, 이런 환경에선 언로가 막히고 제대로 된 비판과 반성이 이뤄지기 어렵다.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현란한 쇄신 구호나 그럴싸한 정책 제언이 아니다. 더 나은 정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난맥상은 강력하게 비판해야 하지만, ‘우리가 못해서 이런 정부가 집권하게 됐다’는 사과도 함께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인사 실패를 문제 삼을 때는 부적격 장관 임명을 강행했던 문재인 정부 잘못에 대해서도 고개를 숙이길 바란다. 윤석열 정부에 질린 민심이 돌아올 곳은 결국 민주당밖에 없다고 믿는다면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악을 피해야 하는 정치적 선택에 몰린 국민들에게 면목 없음을 느끼고, 바뀌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실정 뒤에 숨지 마라.
이용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