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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너무 시끄럽다. 역동적인 국가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최근 몇 년은 유난히 밝혀지는 중대사건도 많다. 주요 공직자, 권력자들의 미투 사건이 그러했고 날마다 올라오는 연예·스포츠계의 폭력 사건도 그렇다. 신의 영역으로 군림하던 재벌가나 가진 자들의 갑질, 위선적 비리 행위도 더욱 자주 도마에 오른다.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경악할 뉴스는 왜 이다지도 많은지, 묻어둔 지뢰 터지듯 연이은 사건·사고 속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LH 부동산 투기 의혹은 어떤가. 사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던가. 그들의 수사를 두고 내부감사를 하네, 검찰에 맡겨야 하네 갑론을박하지만 그 역시 국민들의 실소만 자아낸다. 개탄하는 여야 정치인, 검찰부터 국토부, 지자체 의원들까지 몇 명이나 이 문제에서 투명할까. 어느 조직에 맡긴들 제대로 수사가 될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국민들의 심정이다. “아! 정말 문제투성이 나라야”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불과 한두 세대 전 우리 사회의 모습과 흡사한 미얀마 사태를 바라보며 또 다른 생각을 한다. 군사정권과 혁명기를 거치며 꽃 같은 젊음과 무고한 시민들이 사라질 때 사회는 이토록 시끄럽지 않았다. 무수한 약자, 근로자, 여성, 연예인들의 인권이 유린될 때도, 고립된 광주에서 극악한 학살이 벌어질 때도 외면하거나 침묵했다. 엄혹한 시기일수록 세상은 고요하다. 방송에 나온 미얀마인이 이야기한다. “진짜 두려운 것은 저항의 목소리마저 차단되는 날입니다.” 간절히 국제사회의 도움을 청하는 미얀마의 군중을 보며 아프고 걱정스러운 마음과 다행스러운 마음이 공존한다. 시끄러운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성폭력과 성추행이 없었던 일인가. 이제야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동학대와 참담한 죽음이 올해 시작된 것인가. 이제야 아동의 인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비리와 권력 갑질이 어제오늘의 일인가. 지금부터 감시와 제도 개선의 시작인 것이다. 같은 미투 사건이 터져도 민주당은 얼버무리고, 정의당은 사과하며 공개했다. 김학의 사건처럼 명명백백한 일조차 은폐하는 정당과 조직도 있다. 인간은 늘 실수하고 변화는 느리지만, 대처의 자세가 신뢰를 좌우한다.
화제의 작품 <미나리>를 개봉 날 관람했다. 함께 숲에 들어간 손자가 뱀을 보고 쫓으려 하니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데이빗 그냥 둬, 그러면 뱀이 숨어버려.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 거야. 숨어있는 것이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보이는 것에 민감한 사람들의 인지 편향에 대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비행기 엔지니어들은 총탄을 맞았지만 무사히 귀환한 비행기들의 상흔이 특정 부분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총탄에 맞은 부분들을 더 튼튼하게 보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통계학자였던 아브라함 왈드는 오히려 반대의 논리를 편다. 총탄을 집중적으로 맞아도 무사히 귀환했다면, 오히려 격추되어 귀환하지 못한 전투기들이 저격 당한 부분을 찾아내어 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이다.
최근 엄마의 이사 준비를 돕고 있다. 돌아가신 조부모님의 가구부터 아버지와 숙부의 유품들, 해외에 나간 동생네의 물건까지. 묵은 짐들을 정리하느라 온 집안이 폐허 상태가 된 지 몇 달째다. 바쁜 와중에 오가며 정체 모를 짐들을 풀고, 닦고, 나누고, 버리는 일이 고되고 힘들다. 해묵은 과거를 청산하고 더 나은 삶을 꾸리는 시간이란 늘 그런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더 많은 숨겨진 불편함이 드러나길 바란다. 이 시기를 지나며 우린 또 성장할 것이고, 미얀마의 국민들 역시 저항하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루어내리라 믿고 싶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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