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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88.5%가 차별금지 법률 제정에 찬성했다는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가 궁금했다. 지난해 3월 국가인권위가 ‘혐오차별 국민인식조사’를 하며 같은 질문을 했을 때 72.9%였던 수치가 1년 만에 15.6%포인트 올랐다는 보도가 믿기지 않았다. 국가인권위 홈페이지에서 조사 결과 원문을 찾아 읽었다. 전국의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4월에 실시한 이 조사의 결과를 읽다보니,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항목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설문응답이 드러내는 수치들은 그대로 ‘한국의 차별 이야기’였다.
조사 대상자 중 지난 1년 동안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았다고 답한 사람이 27.2%였다. 차별 사유를 물으니 성(性)이 48.9%로 1위였다. 여성은 71%가, 남성은 16.4%가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차별받았다고 답했다. 그다음으로 높은 차별 사유는 연령으로 43.4%였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차별 이유가 됐다. 나의 성이나 나이는 내가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많이 배우지 못하고(21.3%), 많이 벌지 못하면(23.9%) 차별당했다. 차별을 가장 많이 겪는 장소는 직장(71.0%)이었다. 밥을 벌기 위해 차별을 감당했다는 얘기다.
차별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항했을까? 71.7%의 답은 ‘무대응’이었다. 그중 100% 무대응했다고 답한 사례가 있었다. 전체 응답자 중 0.7%인 성소수자였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고해도 차별이 시정되거나 가해자가 처벌받을 거 같지 않아서’(50%), ‘오히려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어서’(50%)였다.
코로나19 사태는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깨웠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나의 시선이나 행위가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 91.1%였다. “누구도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 그리고 내 가족도 언젠가 차별을 하거나 당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도 90.8%였다. 다행인 것은 “차별은 그 해소를 위해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사회문제”라고 답한 사람이 93.3%라는 것이었다.
차별을 기준으로 마른 땅과 진 땅을 나눈다면, 나는 대개의 경우 마른 땅을 밟으며 살아온 사람인 것 같다. 여자라서, 나이가 많거나 적어서, 비정규직이라서, 차별당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무디다. 1학기에 만났던 학생을 2학기 수업에서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에 “예뻐졌다”고 했더니, 학생이 웃으면서 “선생님,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현행규정인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3호에 열거된 열아홉 가지가 넘는 차별해서는 안 되는 사유에는 용모 등 신체조건에 관한 것도 있다.
차별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 촘촘해지면 사는 것이 팍팍해질까. 무릎 통증 때문에 걷는 것이 편하지 않은 팔순의 어머니는 건물을 드나들 때면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이용하신다. ‘장애인 차별금지법’ 시행령에서는 직무수행 장소까지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경사로를 설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차별이 적어지면, 차별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는 그로부터 예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삶까지 배려받을 수 있다.
정의당이 지난 29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법안이다.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나 그리고 내 가족도 언젠가 차별을 하거나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차별금지법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발의된 이래, 차별금지법 제정은 여섯 번이나 좌초되었다. 일곱 번째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는 무위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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