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근무할 때 협력사 대표 중에 점술에 빠진 분이 계셨다. 회의하러 오는 길에도 단골 점집에 들르는 경우가 많아서, 왜 그리 자주 가서 뭘 그리 의논하시냐고 물었다. 새로 구입할 차 색깔부터 진행하는 일들까지도 묻고 의논한다는 대답이었다. “저한테 오시지 말고 아예 거기서 기획서 컨펌도 받으시죠” 하고 웃었지만, 그렇게까지 점술에 종속된 삶이 놀랍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나도 7~8년 전까지 종종 점을 보긴 했다. 마음 고달플 때의 심리적 카운슬링에 가까웠지만 그마저 안 하게 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마지막 점집에서 해준 이야기가 강렬해서다. “이런 곳에 오시지 않아도 돼요. 본인의 판단력이 충분히 좋으니 자신을 믿고 사세요.” 조금 놀랐다. 양심적인 현자인지 오히려 다시 찾게 만드는 칭찬기법인지도 궁금했고,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인지 어차피 크게 나아질 게 없는 인생이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왠지 부끄러워졌으며, 한편으로는 힘이 되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나이 들며 내 스스로 삶의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어서다. 수많은 인생 드라마들이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실제로 누구나 그런 순간들이 있지만, 대개의 인생은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다. 과거의 내 행동과 환경이 지금의 내 삶을 만들었고, 지금의 내 행동과 환경이 미래 예측의 핵심요소다. 오늘과 일주일 후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오늘과 십년 후의 삶도 대개는 아주 다르지 않다. 직업이 바뀌고 삶의 공간과 곁에 있는 이들이 바뀔 수는 있지만, 살아가는 틀과 행태는 유사할 확률이 높다.
전쟁과 재난 같은 변수는 통제가 어렵지만, 그 또한 상당수는 사회구성원들의 인식과 행동이 누적된 결과다. 인생의 합은 우연보다 통계에 가깝고, 변화나 몰락도 절벽보다 능선에 가깝다. 행운 역시 운명처럼 날아드는 유성보다는 실력과 선한 업이 차곡차곡 누적된 지층에서 캐낼 수 있는 보석에 가깝다고 느낀다.
만족할 인생을 위해서는 자신의 재능과 그릇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해서 기회를 잃거나, 과대평가해서 헛된 길로 빠져들 수 있어서다. 자신의 모습과 수준을 측정하는 지표는 더 많은 타인들이다. 타인 경험의 깊이와 다양성을 넓힐수록 삶을 예측하고 제어할 확률이 높아진다. 알아야 할 것도 바뀌어야 할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자신일 뿐, 운명론과 점괘가 아니었다. 기대고 함께해야 할 것 역시 사람과 자연이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었다. 신은 결코 특정한 인물을 편애하지 않는다.
자신과 세상을 탐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본능이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재미와 힐링, 깨달음 정도를 넘어 성격론이나 운명론에 과하게 현혹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기 객관화와 세계에 대한 인식기반이 취약할 때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터무니없는 것을 희망하거나 반대로 낮은 자존감과 불안감으로 흔들릴 때, 영혼의 갈취자들은 그 틈새를 쉽사리 비집고 들어온다.
상당수의 사람은 내향성이나 외향성의 한쪽만 갖고 있지 않으며 양향성인 경우도 많다. 나도 이런 테스트에선 자주 다른 결과가 나오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입사 무렵과 퇴사 무렵의 성향도 노력한 쪽으로 다소 달라졌다. 뇌과학자이자 하버드대 수석과학 책임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야기한다. MBTI를 믿느니 호그와트 기숙사 배정검사를 선호하는데, 자신은 래번클로라고. 나도 해보니 오늘은 래번클로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