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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의 대명사와도 같은 두 사업장이 있었다. 2009년 976명을 정리해고한 쌍용자동차, 2011년 290명을 정리해고 한 한진중공업이다.

많은 눈물과 아픔, 죽음이 있었다. 끈질긴 투쟁 끝에 해고자들은 하나 둘씩 공장으로 돌아갔다. 지난 5월, 쌍용자동차의 ‘마지막 해고자’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11년 만에 공장으로 돌아갔다. 171일 동안 평택공장 앞 송전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며 굳게 닫힌 공장문을 바라만 보았던 한 전 위원장은 비로소 그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훈훈한 결말’은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35년 동안 복직투쟁 중이다. 김 지도위원의 309일 크레인 고공농성은 시민들의 폭발적 연대인 ‘희망버스 운동’을 촉발해 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로 썼다. 하지만 정작 그는 복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영도조선소의 닫힌 문 앞에 서있다. 지난 6월 ‘마지막 복직투쟁’을 시작했지만 지난주 새벽 출근투쟁에 나오지 못했다. 투병 중이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부산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한파가 매서웠던 서울과 달리, 부산의 햇살은 따사로왔고 푸른 나무들은 이국적이었다. 빽빽한 고층 건물들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던 해운대의 야경은 그동안 몰랐던 부산의 면모였다.

오랫동안 내게 부산은 한진중공업의 도시였다. 매번 영도조선소 인근에서 취재가 끝나면 급하게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영도조선소 인근 빈 식당에서 해고자들이 손수 차린 카레를 나눠먹던 것,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던 85호 크레인, 거리의 행진과 구호 등이 기억날 뿐이다.

2011년 6월엔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이 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 무궁화호 열차 한 량을 빌린 ‘희망열차 85호’엔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들어섰다. “외롭고 무섭죠. 여러분이 외롭지 않게. 말라 죽지 않게 응원하면서 저희도 꼭 이기겠습니다.” 쌍용차 해고자 가족이 말을 건넸다.

그해 추석을 앞두고 다시 영도를 찾았다. 오갈 곳 없는 해고자들이 빈 식당을 임대해 차린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 사무실엔 수시로 해고자와 노동자들이 오갔다. 해고자 전기원씨가 하던 일은 조립이 끝난 배를 시운전하는 일이었다. 전씨는 그 뒤로 몇 번이나 막 태어난 배에 첫 숨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의 복직촉구’ 기자회견에서 김진숙씨를 비롯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마지막 부산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1년 뒤다. 309일의 고공투쟁 끝에 땅을 밟은 김 지도위원을 인터뷰하기 위해 민주노총 부산지역 본부를 찾았다. 땅으로 내려온 지 7개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시기, 김 지도위원은 “약속을 어기면 다시 싸워야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싸운다.

“내가 지닌 이력 중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쉰둘. 살아 내려간다면 단 한가지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꿈꾸며 85호 크레인, 169일을 맞는다.”

김 지도위원은 저서 <소금꽃나무>의 2011년 특별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의 말과 달리, 그는 스스로 가장 진실한 선택을 하며 살아왔다.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당당했고, 법에 보장된 노동자 권리를 외쳤단 이유로 해고되었지만 한 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309일의 크레인 농성 도중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세상과 소통하며 노동운동의 새로운 연대의 장을 열었다. 자신의 몸을 헐고 깎아 정리해고 철회를 이끌어냈지만, 자신의 복직을 조건으로 내걸진 않았다. 진솔한 그의 글은 트위터로, 책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 가슴을 울렸다. ‘미투 운동’이 이슈가 되자,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노동자, 투쟁가, 연대자, 작가, 이 모든 총합이 ‘김진숙’이다.

‘김진숙 복직투쟁’ 154일차인 23일, 김 지도위원은 자리를 비웠지만 그의 동지들이 영도조선소 앞을 지켰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복직은 시대의 복직”이라고 말했다. 노동자, 여성, 사회적 약자 곁을 지켜며 싸워왔던 그가 당당히 조선소로 돌아가기를, 다시 한 번 김 지도위원의 ‘소금꽃’이 피어나기를. 쾌유와 복직을 기원한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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