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990년 11월, 경향신문 30기 수습기자 최종 면접에 응시했다. 취재부문 지원자는 15명, 여성은 혼자였다. 남성 지원자들이 몰려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얼마 전 취임한 사장이 여기자는 꼭 1명 뽑는다고 했다더라.” 나는 합격자 5명에 들었다. 수습 교육 기간 경찰서에 출입했다. ‘사건 없냐’ 물으면 형사들은 대답 대신 박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박카스는 누적 판매량 200억병에 이르는 ‘국민 드링크’다. 이 박카스를 만드는 동아제약이 ‘성차별 면접’ 건으로 입길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공채에 응시했던 여성 A씨의 면접 사례가 최근 이슈로 떠오르면서다.

A씨에 따르면, 면접관 중 1명인 인사팀장은 함께 면접을 본 남성 지원자 2명에게 군 경험과 관련한 질문을 쏟아냈다.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는지, 군 생활 중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등이었다. A씨도 군 관련 질문을 받았는데 내용은 달랐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에 임금을 달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군대에 갈 생각이 있느냐’ 등이었다.

몇 달 후 동아제약은 유튜브 예능 <네고왕2>를 통해 생리용품을 할인 판매한다고 밝혔다. 조회수가 폭발하며 동아제약은 ‘여성친화적 기업’으로 호평받았다. 분노한 A씨는 면접 경험과 관련한 댓글을 달았다. 불매운동 조짐이 일자 동아제약은 유튜브 댓글란에 최호진 사장 명의 사과문을 올렸다. ‘면접관 중 한 명이 지원자를 불쾌하게 만든 질문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사과문을 보고 더 화가 났다고 한다. 질문자가 인사책임자였음에도 ‘면접관 중 한 명’의 일탈로 축소하고, 성차별을 인정하는 대신 ‘지원자를 불쾌하게 만든’ 수준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A씨는 온라인에 상세한 반박 글을 올리고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일부에서 사측을 옹호하는 주장도 나왔다. 질문의 뉘앙스가 달랐다, 다른 문제로 탈락했을 수도 있는데 젠더 이슈를 끌어들인다, 최종 합격자 4명 중 3명이 여성이었다….

전형적인 ‘논점 흐리기’다. 초점은 질문의 뉘앙스도, A씨의 자질도, 합격자 성비도 아니다. 2019년 여성가족부와 경제단체들이 함께 펴낸 성평등 채용 안내서를 보자. “특정 성별에게만 유리하거나 불리한 주제(예시: 군대 경험)에 대해 토론하도록 하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면접과정에서 성별을 이유로 질문사항을 달리하지 않는다.” 동아제약 인사팀장의 질문은 이 기준을 위반했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때문에 여자를 뽑을 생각이 없는데 그래도 불러봤다.” 직장인 B씨는 면접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가 “미투는 남자가 잘못해 발생한 일 아닌가요”라고 묻자 면접관은 “미투를 방지하기 위해 여자를 안 뽑는다”고 했다. B씨가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하자 면접관은 “지금 만나는 남자도 (그 생각을) 알고 있나. 그래도 애는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경향신문 3월10일자 보도).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에 선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는 정갑윤 자유한국당 의원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결혼 안 하셨죠? 출산율이 결국은 우리나라를 말아먹습니다. 본인 출세도 좋지만, 국가 발전에도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힘센 부처다. 이런 기관의 수장 후보자도 여성이라면 ‘채용 갑질’을 당한다. 미혼 여성은 결혼할 거라고, 결혼한 여성은 출산할 거라고, 비혼·비출산 여성은 국가에 기여 못했다고 비난받는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성차별 면접에 대한 질문을 받고 “노동위원회에 구제 절차 신설을 추진 중”이라며 “관련 법을 보완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의 남녀고용평등법이나 채용절차법은 보완해야 한다. 그렇다고 주무부처가 입법공백만 탓하며 손놓고 있을 텐가. 문제가 심각한 기업에 대해선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해야 마땅하다.

31년 전 내가 5등 안에 포함돼 합격했는지, 어퍼머티브 액션(적극적 우대조치)으로 들어왔는지 이제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당시 면접관들이 나를 선택한 만큼, 경향신문이 생산하는 콘텐츠의 다양성은 단 0.1%라도 높아졌으리라 믿는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기업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수습 시절 맛보았던 박카스의 짜릿함을 기억하지만 당분간 박카스는 안 마실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