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와 제자들이 하루는 석문이란 곳에 유숙했다. 석문은 노나라의 성문 중 하나였다. 그곳 성문지기가 제자 자로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자로는 공자의 문중에서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성문지기가 말했다. “아, 그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기어이 하려고 하는 사람 말이오?”
공자의 말은 공자 살아생전에 이미 성문지기도 익히 알 정도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어지러운 현실을 떠나 살던 은자들로부터 애쓰지 말라, 당신만 힘들 뿐이라는 충고를 거듭 듣기도 했다. 당신이 애쓴다고 하여 참된 말이 현실에서 쓰이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고 자기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자기 말이 쓰일 가능성이 별로 없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하여 그는 자기 말을 ‘공언’이라고 칭했다. 말이라는 뜻의 언(言) 앞에 비어 있다는 뜻의 공(空)을 붙여 만든 말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비어 있는 말’, 그러니까 쓸모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용이 허접하기에 비어 있는 말이라 칭한 것이 아니었다. 내용은 옳고 충실하지만 세상이 무도하다 보니 쓸데가 없어진 말이 되었다는 얘기다.
진리가 힘쓰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공자는 좌절하지 않고 깨어 있는 목소리로 세상을 울리고자 했음이다. 그래서 현자의 공언은 절실함의 언어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쓰이지 않는다고 해도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삶을 위해서는 꼭 일깨워야 하는 바이기에 피치 못하여 한 말이다. 당대 현실에서는 쓰이지 않았을지라도 공언에 담긴 선하고 아름다운 뜻이 시대를 가로질러 면면히 이어졌던 이유요, 공언을 세상에 드리운 이가 대대로 칭송되었던 까닭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현자가 없는 사회가 되었다. 아니 현자를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현자의 공언이 실현되는 사회가 더는 아닌 셈이다. 그렇게 현자의 공언이 사라진 자리에 ‘공약(空約)’이 활개치고 있다. 덜된 야심가들의 공언만이 판치는 세상이다. 공정(公正)도 ‘공정(空正)’, 곧 속 빈 정의임이 드러나고 있다. 세상의 무도함을 탓하기 전에 사람의 무도함을 탓해야 마땅한 나날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