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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 추세가 좀처럼 줄지 않는 가운데 ‘잔여백신 예약제’는 확실히 ‘신의 한 수’인 듯하다. 부작용을 겁내는 이들에게 무리한 강요 없이 접종률을 끌어올리고 있으니, 너지 전략의 훌륭한 사례라는 평도 나온다. 글쎄 방역당국이야 아까운 백신을 한 명이라도 더 맞히기 위해 고안한 대책일 뿐, 설마 사람들의 경쟁심을 자극해보자는 계산을 처음부터 했을까. 다만 건강을 향한 경쟁적 욕망과 집단면역 달성에 동참하려는 선한 의지가 결과적으로 백신 접종에서 훌륭한 접점을 찾았다는 게 즐겁기는 하다.

과연 면역이란 본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선택과 공동의 의지가 합쳐져야만 가능한 무엇. 작고한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이 남긴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는 종래의 생활이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 두기도, 마스크도, 손 씻기도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위협적인 것은 개인의 생명에 대한 직접적 위협보다는 그로 인해 경제와 사회의 시스템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저격한 것은 개인의 면역력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적 면역력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코로나19로 인해 이렇게 흔들리는 사회라면, 오히려 멀쩡하게 보였던 예전이 원래 비정상이고 지금이 바로 정상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반문하는 것도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질문을 우리 인간들 자신이 던진 게 아니라, 자연이 ‘코로나19’라는 표현방식을 빌려 던져왔다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과 동등한 능동적 행위자로 보자는 철학자·인류학자들의 제안은 진즉 있었거니와 우리는 지금 그 실례를 보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활동이 한계를 벗어났고, 인간들 자신의 공동체마저 와해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자연이 던졌으니 이제 우리가 거기에 응답할 차례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의 문화 전체가 면역의 체계로서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낯선 타자에 대해 단순히 신체적 면역체계만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라는 사회적·정신적 면역체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생존을 도모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은 자발적인 금욕과 고행을 자기 수련의 방법으로 택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기후위기와 팬데믹이라는 자연의 도전에 대해 우리가 택해야 할 면역의 방식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절제와 금욕을 통한 자기 유지란, 백신이라는 자가 감염을 통한 면역의 획득 과정과 매우 닮아있지 않은가. 자연이 강요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는 것, 인간은 이런 선택을 할 줄 아는 존재다.

국립과천과학관 이정모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생존력 확보라는 진화적 기준으로 볼 때 인간은 박테리아보다 못한 존재라는 말 좀 그만하세요. 인간이 있어서 우주는 136억년이라는 자기 나이도 알게 되었고, 박테리아와 곤충과 파충류들도 이름을 갖게 된 거예요. 심지어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반성할 줄도 알고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는 존재라니까요.” 거창한 얘기를 덧붙이자면, 니체는 인간이 주어진 본성을 넘어 제2의 본성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했다. 자기 자신의 자연을 자기 이상의 것에 합치시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우리가 달성해야 할 집단면역이 반드시 신체적 면역만이 아님을 알려준다. 방향을 모르고 달리던 예전의 삶보다 오히려 지금의 삶이 정상적으로 보인다면,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 사회를 재조립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집단면역일 것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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