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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성년을 맞이한 세대라면 당시 미국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이자 친미 독재자 혹은 ‘매판자본’을 통해 제3세계를 지배하는 ‘신’제국주의 국가라는 양면의 이미지를 가진 나라로 인식되었다. 전두환 독재의 권위주의, 반민주적 제도와 공권력의 지배가 강해질수록 그 든든한 배경으로 여겼던 미국에 대한 반감도 커졌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후부터 미국은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한때 950기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당시 남한에 배치된 전술핵무기 문제가 남북관계에 큰 걸림돌이었고, 민주화와 통일을 지향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반핵운동의 중요성도 컸다. 핵전쟁으로 한반도의 존속을 위협하며 민주화를 막고 있다고 여겼던 미국 정부를 향해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이라 외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1987년 12월 민주화운동의 결실이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맞이한 첫 선거에서 역설적으로 독재정부의 2인자 노태우가 당선됐다. 다수 후보를 낸 민주화운동권의 분열도 원인이었지만 이런 분열을 파고들 만큼 당시 독재정부와 여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 역시 상당했다. 오랜 권위주의 속에 만들어진 반공주의와 민주화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내모는 매카시즘에 여전히 민주주의에 미숙한 많은 국민들이 동조했던 것이다. 이때 군사독재 권위주의의 명맥이 유지됐던 것은 그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 정치를 퇴폐적 이념논쟁과 지역갈등으로 내몰았던 패착이라 생각한다.
1989년 12월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개혁·개방을 이끌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 미·소 정상회담에서 ‘동서 협력시대’가 논의되었고 탈냉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991년 미·소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이 타결되어 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남북은 1992년 1월 남북 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로도 남한의 전술 핵 철수에 대한 북한의 불신은 지속됐고,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본격적인 핵개발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제1차 북핵위기였다.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북한이 제기하는 쟁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의 핵 위협과 한·미 군사훈련이 도마 위에 있다. 달라진 것은 이제 북한이 30기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고, 한반도 평화는 더욱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됐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과 현대화 역시 지속되었다. 핵무기와 관련된 미국 정부 예산은 2019년 약 350억달러에서 2025년 약 550억달러로 빠르게 늘어날 계획이다. 우리 민주주의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문제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했고 이념논쟁과 소모적 정쟁의 도구로 삼기에 급급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방조됐고 한반도 평화는 다른 나라 문제였으며 남북의 군사적 긴장은 국제정치의 유용한 카드였다.
2016년 대선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기괴한 선택을 했다. 나라 안으로는 차별과 갈등을 선동하고, 나라 밖으로는 수많은 변수들의 균형으로 형성된 무역, 군사, 외교 질서를 미국이라는 기업의 단기 수익성에 따라 서슴없이 파괴하는 지도자를 선택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방역 실패와 그로 인한 경제난으로 트럼프의 재선 실패는 당연해 보였다. 결과는 맞았지만 내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개표 초반부터 박빙의 경쟁이 이어졌고 선거의 승패를 좌우한 경합지에서 미세한 격차로 바이든이 트럼프를 눌렀다. 미국 민주주의의 트럼프 질병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지난 4년간의 북·미관계 속에서 트럼프의 파격이 많은 한국인에게 희망을 준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처럼 미국 정치에서 북·미관계와 북핵 문제를 팔았던 정치인도 없었다. 우리 민주주의가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기에 역부족이라면 미국의 민주주의 아니 모든 민주주의에 호소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보편적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상위의 가치를 점한다. 평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체가 노력하면 우호적 국제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상당수의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들이 종전선언을 지지하고 나섰다. 바이든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지도자로 꼽는다고 한다. 그만큼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중요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도자다. 지금까지 보기 어려웠던 한·미 진보 정부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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