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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 남유럽의 나라들이 재정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PIGS로 알려진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이다. 이들은 만성적인 무역적자, 감세로 인해 약화된 세수기반에 늘어난 복지지출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어려움에 처했다. 국가부채 증가는 국가신인도 급락으로 이어졌다. 가장 취약한 그리스가 부도상황을 맞자 재정적자 규모가 큰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파급됐다. 이들은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가혹한 긴축을 받아들여야 했다. 수년간 고통의 기간을 거친 뒤 서서히 경제가 회복됐다. 재정여건도 차츰 개선됐다. 그럼에도 국내총생산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유로존 평균(84.1%)을 크게 웃돌았다. 지난해 말 정부부채는 그리스가 176.6%, 이탈리아 124.8%, 포르투갈 117.7%, 스페인이 95.5%를 기록했다.
올 들어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확산하면서 이들 국가는 10여년 전과 데자뷔 상황에 직면했다. 급격한 경기후퇴를 방어하기 위해 재정투입을 늘리면서 다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들 국가의 부채는 급증하고 있다. 그리스는 200%, 이탈리아 160%, 스페인은 120%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반복되는 재정위기의 늪이다. 국가재정은 양호할 때 지켜야 한다. 일단 늘어난 빚은 두고두고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정부 부채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정부는 올 들어 3차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이라는 초유의 확대 재정에 나서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 결과만으로도 한국은 112조2000억원의 적자(관리재정수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말 국가채무는 728조8000억원이었으나 반년 만에 840조2000억원으로 증가한다. 정부부채비율은 지난해 38.1%에서 43.7%로 오르게 된다. 상승세가 가파르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흔들리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국가들이 재정투입에 나서고 있다. 차갑게 식어가는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다. 당장의 급한 불을 꺼야 피해 확산을 막고 앞날을 도모할 수 있다. 부채 증가를 겁내 재정투입을 미루었다가는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역할이다. 능력이 되는 만큼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지금 국가 재정여건이 그나마 나은 것은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둔 노력의 결실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정부의 씀씀이를 보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 3년간 빠지지 않고 추경을 편성했다. 추경은 논란 끝에 수조원에서 10조원 수준에 머물렀다. 한편으로 과감하지 못했다고 평할 수 있지만 그만큼 꼼꼼하게 따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젠 조단위의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정부의 허술한 재정관리의 단면은 이번 재난지원금에서 드러났다. 재난지원금 규모는 14조2448억원이다. 정부는 이 가운데 10~20%가 기부로 이어져 1조4000억~2조8000억원 정도가 모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 자금으로 적자에 허덕이는 고용보험기금 재원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런데 지원금을 받아간 가구가 전체 대상의 99.5%를 넘었다. 기부운동까지 벌였으나 기부금은 7000억원도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순진하게 헛물만 켠 셈이다.
방만한 정부의 태도는 미래 세대의 피해로 이어진다. 나랏빚을 내면서 돈을 풀겠다면 투입 규모, 용처, 향후 재원보충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재정은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현실적인 적합성과, ‘팬데믹으로 인해 달라질 세상에 대응’이라는 미래의 준비에 부합해야 한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고착된 낡은 경제구조를 개혁할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불을 끄기 위해 물을 썼다면 다음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비해 다시 채워넣어야 한다. 국가부채를 줄여 미래세대에 쓸 수 있도록 보완해놓아야 하는 것이다. 증세 문제를 적극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부가 확대재정의 근거로 삼는 국가부채는 한국이 여타 국가보다 형편이 낫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상황이 다르다. 국가부채, 공공기관부채, 가계부채를 합한 총국가부채로 확대해보면 한국은 주요국 가운데 평균 정도 수준의 나라다. 국제결제은행(BIS) 자료를 보면 2019년 한국의 총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237%다. 조사대상 42개국 가운데 22위로 중간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의 총부채 증가속도는 세계 4위다.
남유럽국가들도 애초부터 빚더미 국가는 아니었다. 국가의 자산은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공유하는 것이다. 미래세대에 짐을 떠넘기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종성 논설위원 p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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