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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표현의 자유를 통해 보장되고 확장된다.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인권은 거론조차 불가능하다. 인권 신장과 표현의 자유 확대는 같은 길 위에 있다. 문명사회일수록 시민은 확장된 표현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표현의 자유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통해 구현되며, 검열은 반문명으로의 회귀다.
영국 시인 존 밀턴은 자유언론을 찬양했다. 그는 왕당파와 교회파가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며 서로 반대파의 의견을 말살하던 시대를 살았다. 출판물에 대한 허가와 검열이 계속되던 때였다. 그는 출판물에 대한 허가검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의 저서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를 발표했다. 이는 자유언론 옹호의 고전적 성서가 되었다. 그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임을 믿었고 진리는 절대적이고 입증 가능하며 ‘자유롭고 공개된 경쟁’이라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그러면 진실의 편이 반드시 생존하고 승리한다. 허위와 불건전은 ‘공개된 자유시장’에서 다투다가 마침내는 패배하리라. 권력은 이러한 선악의 싸움에 일절 가담하지 말라. 설혹 허위가 잠정적으로 득세하더라도 마침내 선과 진이 ‘자율조정의 과정’을 거쳐 궁극적 승리를 얻을 것이다.”(<박권상 언론학> 박권상기념회)
인권에 대한 각성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지폈다. 이는 최초의 민주혁명인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혁명정신에도 녹아들었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은 “공민은 남용에 책임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언론, 제작 및 출판을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한국 헌법 21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각인돼 있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는 곧 표현의 자유다.
언론의 자유는 여타의 자유보다 우월적 지위를 갖는다. 이에 대한 침해를 막기 위해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 사전적 제약이든 사후적 제약이든 마찬가지다.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이나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와 같은 사전적 제약은 금지된다. 사후적으로 제약하는 경우에도 언론이 미치는 해악이 목전에 절박하여 다른 수단으로 방지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정당화된다. 이 같은 제약을 두는 것은 이를 통해 국가권력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언론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핵심은 ‘방송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과 ‘온라인상 표현의 자유 확대’였다. 특히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은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시절 당론으로 추진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야당에서 여당으로 바뀐 21대 국회에서는 당 차원의 논의가 실종됐다. 그리고 ‘온라인 공간 표현의 자유’ 공약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최근 민주당 등 범여권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이 법의 핵심은 징벌적 손해배상·고의 중과실 추정·열람차단 청구권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허위·조작보도 시 손해액의 5배까지 배상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악의’ ‘허위·조작’이라는 것은 개념조차 모호하다. 형벌 법규는 범죄 구성요건과 법적 결과인 형벌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하는데 개정안은 이에 위배된다. 그리고 고의·과실에 대한 입증책임도 피해자가 아닌 언론사에 있다고 한 것은 ‘피해자 입증책임’ 원칙에 반한다. 이중처벌 논란도 있다. 이 법이 통과되면 대통령 등 고위공직자나 기업이 ‘허위·조작보도’라고 주장하며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를 남발할 우려가 높다. 실제 개정안을 처음 발의한 이상직 의원은 ‘500억원 횡령·배임 의혹’ 보도에 ‘가짜뉴스’라고 펄펄 뛰었지만 사실로 드러났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재선 연설에서 “신문의 비평에 참을성이 없는 정부는 쓰러져야 마땅하며 연방정부의 참된 역량은 공중의 비평을 허용하고 인내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도 당시 신문의 횡포에 분개하는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일관되게 언론의 역할을 인정했다.
범여권은 이달 말 언론중재법 개정을 밀어붙일 태세다. 논의도 부실하고 절차도 생략됐다.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신검열’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반대의견에는 귀를 닫았다. 역병으로 많은 민초가 도탄에 빠져 있다. 하필 왜 지금이어야 하는가. 한국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현실이 정상적이라고 믿기 어렵다. 묻고 싶다. “언론이 그렇게 두려운가.”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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