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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의 처벌 기준을 완화해 달라는 경영계 요구가 줄기차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도 ‘규제개혁’의 이름으로 중대재해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최근에는 기획재정부가 경영계의 요구를 전폭 수용한 중대재해법 시행령 개정 방안을 고용노동부에 전달한 일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소관 부처인 노동부 업무에 대한 ‘월권’이나 경영계의 요구를 반영했다는 것에 있다기보다, 정부가 주도하는 ‘중대재해법 손질’이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이유로 추진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중대재해법은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한 법이 아니다. 산업재해의 예방과 감소를 위해 기업 최고경영자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처벌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중대재해법의 취지가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한 것에 있지 않다.
중대재해법은 오로지 ‘부정의’로서 산업재해에 주목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산업재해는 ‘산업성장’ ‘경제발전’이라는 모든 정의에 우선한 정의를 추구하는 데 따른 ‘부수적 피해’로 간주되어왔다. 산업재해는 불가피한 손실일 뿐이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정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노동자의 위험을 둘러싼 기업과 노동자 간의 부당한 권력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정치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부수적 피해’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사람’과 ‘위험이 초래된 결과를 겪는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 사이에서 심화되는 위험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2000년 초반부터 시작된 ‘기업살인법 제정운동’은 부수적 피해로서 산업재해를 바라보는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부터 출발한다. “산재 사망은 기업의 조직적, 구조적 살인이다”라는 구호는 노동자가 아프고, 다치고, 죽는 ‘사건’을 ‘기업범죄’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구조적 폭력의 주체로서 기업의 책임을 묻는다.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적용하고 평가하고 고치는 과정들을 미룰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실행의 기준은 ‘기업 경영활동의 위축’이 아니라 ‘산업재해’라는 부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기업과 노동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노동이 기업 활동의 일부로 간주되는 순간 노동의 자율성은 사라지고 노동의 종속은 노예노동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이 비록 허명에 불과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치에서, 그리고 법에서 노동은 기업과는 다른 범주로 다루어야 한다.
중대재해법의 실효성을 월별 산재 사망 통계치와 같은 산술적인 결과로 협소화하거나, 기업 활동 위축과 같이 법의 취지와는 무관한 엉뚱한 잣대로 문제 삼는 것은 모두 법의 정당성을 축소하거나 훼손한다.
반면 법이 부정의로부터 출발한다면 어떨까. 가령 제도 바깥으로 배제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위험을 마치 새로운 위험인 듯이 발견하고, 놀라워하고, 말하기 시작했는지를 조사하고, 중대재해법이 이러한 과정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를 포함한 개선 방안이라면 기재부가 제출한 것이라도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연재 | 시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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