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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신호들

opinionX 2022. 4. 21. 09:47
 

어릴 적부터 종종 넘어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면 웃음이 났다.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이내 울음을 터뜨렸지만, ‘걸려 넘어지는 일’은 내게 어떤 신호처럼 다가왔다. 너무 빨리 가고 있다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생각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돌부리도 있었다. 그것은 나를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들었다. 걸려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킨 이들이 있었다. 가족, 친구, 동료부터 시작해 책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생면부지의 사람들까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툭툭 털고 일어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때마다 어떤 신호가 다가왔다. 그 신호는 내게 잘 살고 있냐고 천진하게 묻고 있었다. 이대로 사는 게 괜찮으냐고, 혼자 일어설 수는 없었느냐고. 천진한 질문을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이것이 내가 넘어짐 앞에서 매번 겸허해진 이유다.

2009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 1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신체적인 아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삶을 되찾는 빽빽한 시간 이후에는 길고 무료한 시간이 찾아왔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질문은 이것이었다. 퇴원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은가. 떠오르는 것은 많았지만 정작 뾰족한 답이 없었다. 놀러 가는 것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나는 그 답들을 차곡차곡 수첩에 적어두었다. 재수술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 눈앞에 햇살이 쏟아졌다. 무엇이든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신호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간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와 분명히 다른데도, 으레 괜찮을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거나 원래 하던 방식이 옳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신호탄을 무시하면 때때로 몸이 나서서 불발이라고 반응한다. 번아웃 증후군 또한 내겐 난데없이 등장한 돌부리였다. 처음에는 외면하고 다음에는 부정하다가 결국 심신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을 때, 그제야 나는 삶의 우선순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자람의 산문집 <오늘도 자람>(창비, 2022)을 읽다가 다음 대목에 또다시 걸려 넘어졌다. “뒤늦게 알았다. 내 몸을 아끼는 것은 나 자신의 의무일 뿐 다른 누가 챙겨주는 영역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몸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 내게 말을 하고 있고 그것을 듣고 행동해야 할 주체는 나뿐이다.” 몸의 신호를 외면하고 하던 대로 직진하던 사람들은 결국 돌부리에 걸린다. 걸려 넘어진다. 이전처럼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일으켜줄 사람이나 일어날 기력이 없을 때도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2001년 가을,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쓰라는 신호였다. 2016년 10월,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잠재된 것을 발견하라는 신호였다. 2018년 1월, 아빠가 암 투병을 시작했다. 곁을 지키라는 신호였다. 아빠와 산책하며 거리에 섬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도와달라고, 당신의 관심이 절실하다는 신호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는 이내 그것을 쓰라는 신호가 되었다.

코로나19에 확진되어 자가 격리를 하는 첫날, 이 글을 썼다. 방심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셈이다. 넘어진 사람은 눈앞에 있는 바닥만 허망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뒤돌아 어디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파악할 수도 있다. 발자국을 헤아리는 시간은 궤적을 신호로 변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껏 내가 거쳐온 길에 놓여 있던 돌부리를 떠올린다. 걸려 넘어지기 위해 스스로 돌을 놔둘 필요도 있을 것이다. 순탄한 길 위를 걷는 사람은 험한 비탈길에 있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니까. 해석되기 전의 신호는 늘 외롭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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