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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이 지났다. 정부가 세 번 바뀌고, 각종 수사와 조사, 책임자 처벌을 위한 사법 절차도 진행됐지만 피해자들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신체적 고통과 경제적 압박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가습기살균제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아이는 어른이 된 지금도 천식과 아토피에 시달린다. 고통받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엄마는 10년 넘는 세월을 ‘1분 대기조’로 살았다. 폐 이식 수술을 두 번이나 한 피해자 가족은 집과 보험금까지 담보로 대출을 받아 간병비와 치료비를 대고 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검은 상복을 입고 영정을 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절규한다.
어렵사리 마련된 피해자 지원안은 무산 위기에 처했다.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사들과 피해자단체가 참여하는 “사적 조정기구”(가습기살균제 피해조정을 위한 조정위원회)는 피해자 유족에게 2억~4억원, 최중증(초고도) 피해자들에게 최대 5억여원을 지급하라는 조정안을 만들어 SK케미칼·SK이노베이션·LG생활건강·GS리테일·롯데쇼핑·이마트·홈플러스·옥시레킷벤키저·애경산업 등 9개 기업과 피해자단체에 보냈다. 가해기업들이 내야 하는 돈은 최대 9240억원. 하지만 절반 이상을 부담해야 할 옥시와 애경이 수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적 조정기구라지만, 최악의 참사를 유발한 기업들이 조정안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피해자들로선 금액을 더 줄여서라도 합의하거나, 소송으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내몰렸다.
1994년부터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살균제는 ‘살균 광풍’을 타고 1000만병가량이 팔렸다. 누구나 어디서든 한 번쯤은 들이마셨을 것이다.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은 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추산되는 피해자 95만명 가운데 정부에 피해구제를 신청한 사람은 7600여명, 이 중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에 따라 피해를 인정받은 사람은 4000여명에 불과하다. 공식 사망자만 1700명이 넘는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국회 국정조사, 검찰 수사,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실체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업들의 얄팍한 상술과 안전 불감증, 독성 물질 관리감독에 손놓고 있었던 정부의 무능이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피해자 지원에 적극 나서기는커녕 피해를 입증하란다. 가해기업들에 대한 법적 책임도 반쪽에 그치고 있다.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 관계자들은 대법원에서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임직원들은 1심 재판 결과 무죄였다. SK케미칼 등이 사용한 화학물질이 옥시 등이 사용한 원료와 다르고, 폐질환 발생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정부는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막겠다며 뒤늦게 환경성질환을 일으킨 기업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했지만, 당초 피해액의 최대 10배였던 배상금 규모는 국회 심의과정에서 3배 이내로 축소됐다. 미국에서 같은 참사가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미국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액 상한선이 없는 주가 여럿 있고, 최대 500배 넘는 배상을 물린 판결도 있다. 미국 법원이 지난해 존슨앤드존슨의 제품을 사용하다 난소암에 걸렸다고 주장한 여성 22명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금액은 2조5000억원(21억2000만달러)에 달한다.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배상액이다.
“사적 조정”을 해보라며 뒤로 빠져 있는 정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과하고 피해구제 등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하지만 바뀐 건 없다. 여전히 제대로 된 사과와 위로, 배·보상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두 차례 개정되면서 피해 인정 범위가 다소 넓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피해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수천명에 달한다. 정권 이양을 목전에 두고 ‘검수완박’에 사생결단으로 나서는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에서 또다시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될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해선 어떠한 의지 표명도 없다.
시중에는 가해기업들이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것이 친기업을 표방하는 윤석열 정부 출범과 무관치 않다는 말도 나온다. 정부가 바뀔 때까지 버틸 심산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조정위 활동기한이 2주도 남지 않았다. 희망고문은 이미 충분하다. 윤석열 당선인이 나서야 한다. ‘공정과 상식’을 바로세울 자리가 바로 여기다.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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