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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 비상한 사람이 유독 많은 곳이 정계다. 사람의 특징이나 대화 내용을 명함에 적어 놓는 정치인도 곧잘 본다. 사람 만나는 게 일이자 경쟁력이고, 깜박 실수하기 좋은 것도 사람인 까닭이다. 그쪽으로 인상 깊은 사람이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다. 10여년 전 그는 1970년대 서강대 교수 시절 박정희 정부 차관·국무회의에서 재형저축·의료보험 제도를 브리핑한 일이나 정객들과 만난 일화를 떠올리며 30년도 지난 연월일시를 줄줄 꿰었다. 자서전에도 다 쓰지 않은 머릿속 숫자들이다. 민주당 쪽에선 권노갑·김상현 전 고문의 기억력이 군계일학이었다.
그랬던 김 위원장도 얼마 전 실수를 했다.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김 위원장이 내게 큰별이 될 거라고 말했었다”고 하자, “별이라는 건 아무한테나 하는 소리가 아니다”라고 잡아뗐다가, 박 후보가 20대 총선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그 축사를 한 김 위원장 동영상을 공개하자 머쓱해진 것이다.
이렇듯 기억은 도깨비방망이 같다. 사람과 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름·숫자·노랫말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사랑 얼굴보다 그를 만난 호떡집 주인이 더 생생할 때도 있다. 기억은 재밌거나 슬픈 일, 사고나 특별한 사람을 만난 일이 오래간다고 한다. 어린 시절 기억은 6~8세부터 잘 나고, 30세 넘으면 퇴화가 시작된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말이다.
지난 29일 서울시장 후보 TV토론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의 ‘기억’이 도마에 올랐다. ‘셀프보상’ 시비가 인 처가의 내곡동 땅을 2005년 측량할 때 경작자나 측량자가 “오 후보가 왔고, 생태탕도 함께 먹었다”고 말한 게 발단이다. “가지 않았다”며 불법 경작자를 문제 삼고, “삼인성호(三人成虎)”라며 음모설까지 지피던 오 후보가 토론회 말미에 “기억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가고 안 간 것이 본질(특혜·관여)이 아니라고 하다 기억이란 변수를 내밀자 토론은 ‘거짓말’ 공방으로 번졌다. 내곡동 땅 존재나 위치를 모른다고 했던 ‘덜컥수’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된 격이다. 오 후보의 말엔 증거와 죄를 따지는 변호사 화법이 배어 있다. 진위 다툼은 길어질 터이나, 선거사에는 이미 어록이 하나 더해졌다.
이기수 논설위원
오피니언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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