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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수포자’

opinionX 2022. 7. 8. 09:29
 
‘수학을 포기한 사람’을 의미하는 ‘수포자’는 한국에서 유독 많이 쓰이는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필즈상을 수상한 수학자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자신이 한때 ‘수포자’였다는 언론 보도에 ‘수학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수상 전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구구단 외우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화를 말했을 뿐인데, 이를 두고 기사에서 ‘수포자’라는 표현이 제목으로 쓰였다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수포자’(數抛者)는 ‘수학 포기자를 줄여 이르는 말’로 정의돼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 검색 시스템인 빅카인즈 검색을 하면 ‘수포자’는 2008년 10월 한 입시학원 관계자의 일간지 기고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엔 ‘수리 영역 포기자’의 줄임말로 쓰였다. 정시 비율이 지금보다 높던 시절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리 영역 점수가 입시를 좌우한 상황에서 쓰인 용어였다. ‘언포자’(언어 영역 포기자), ‘외포자’(외국어 영역 포기자)와 달리 ‘수포자’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주목할 것은 ‘수포자’가 유독 한국에서 많이 쓰인다는 점이다. 일본의 수학 평론가 모리타 마사오는 최근 출간한 책 <계산하는 생명>에서 “‘수학을 싫어함’, ‘수학 알레르기’ 같은 말이 세계 곳곳에 있다”며 “나는 지금까지 몇번인가 한국 아이들 앞에서 수학 강의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을 의미하는 ‘수포자’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영어권에서는 ‘수학 공포증’(mathemaphobia) ‘수학 불안증’(math anxiety)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며 수학과 만나면 통증, 공포와 관계된 신경회로가 작동하는 아동 사례를 설명했다. 영어권과 일본에서 수학을 두려워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의학적 표현은 있지만 ‘수포자’ 같은 말이 일상어로 통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언젠가부터 ‘승포자’(승진 포기자), ‘임포자’(임원 포기자), ‘장포대’(장군 승진 포기한 대령),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한 젊은 세대)처럼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을 많이 써왔다. 우리는 어느새 ‘포기의 민족’이 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과도한 경쟁에서 낙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너무나 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소극적인 저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손제민 논설위원


 

오피니언 |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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