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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를 샀다. 딱딱하고 투명한 플라스틱 포장 안에 밀봉돼 있다. 손으로 절대 뜯어지지 않는다. 가위가 없으니 그 대신 커터 칼로 포장재를 힘껏 자른다.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 손을 베인다. 칼이 아니라 플라스틱에 베이기 일쑤다. 잘린 플라스틱 포장재는 오이를 썰 정도로 단면이 날카롭다. 가위 말고도 이런 물건은 많다. 마우스·전구·건전지·면도기·칫솔 등 생활용품과 아이들의 자그마한 장난감류가 대개 이렇게 포장돼 팔린다. 누구나 접했을, 속 터지고 위험천만한 포장이다.
이를 ‘블리스터(blister) 포장’이라고 한다. 블리스터는 물집이라는 뜻이다. 얇은 플라스틱 시트를 가열·성형해 물집처럼 볼록 튀어나온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물건을 넣고, 평평한 판지나 플라스틱 판에 밀폐 접착하는 포장을 말한다. 물건을 겉에 보여주니 진열·전시 효과가 좋고, 내용물보다 부피가 큰 포장이라 도난 방지에도 유효하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쓰인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뜯기 어려운 데다 뜯다가 다칠 위험까지 있어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포장이다. 영미권에서는 ‘포장 분노’(wrap rage)라는 말이 흔히 쓰일 정도라고 한다.
분노 유발 포장은 소비자들의 정신 건강만 해치는 게 아니다. 환경 오염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종이와 플라스틱을 분리·해체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재활용도 어렵기 때문이다. 블리스터 포장에 사용되는 폴리염화비닐(PVC)과 복합재질 플라스틱은 대부분 재활용이 되지 않아 일반 쓰레기로 소각·매립돼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이 된다. 이 포장이 과대포장의 원흉인 점도 심각한 문제다. 플라스틱 공해를 가중하는 포장인 것이다.
자원순환사회연대가 블리스터 포장 퇴출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단체에 따르면 2019년 231억원 규모였던 전 세계 블리스터 포장이 2027년까지 해마다 7.2%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한국에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불필요하고, 위험하고, 환경 오염을 가속화하는 블리스터 포장은 ‘악마의 포장’으로 불리는 지경이다. 하루빨리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마침 7월3일은 매년 돌아오는 ‘세계 플라스틱 안 쓰는 날(Plastic Free Bag Day)’이다.
차준철 논설위원
오피니언 |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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