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나보다 연배가 위인 여성과 이 프랜차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났다. 그는 집 앞에 이 가게가 생겼기에 들어가 보았지만 한참 둘러보다가 그냥 나왔다고 했다. 사람이 있어야 이것저것 물어보고 좋은 상품을 고르는데, 물어볼 수가 없는 게 답답했고 그래서 다신 가지 않았다고 했다. 과연 상품 이름으로 무엇이 들어간 샌드위치인 줄 대강은 알 수 있었지만, 불투명한 포장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매장만 오프라인에 있지, 온라인 쇼핑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쇼핑을 할 때의 경험은 이렇다. 연출된 이미지를 보고 물건을 사고, 쓰면서 적당히 만족한다. 그러다 직접 써 보기 전엔 알 수 없던 부분을 발견하면 거기에 적당히 불만족한다. 불편을 그냥 견디거나, 남 주거나, 버리는 식으로 아쉬움을 ‘셀프’ 처리하는 것까지가 소비 경험의 당연한 일부였다.
한번은 동생이 유럽에서 전시를 보러 갔다가 앞에 선 다른 외국인 관람객이 티켓 창구 직원과 차근차근 소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는 걸 보고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를 해 준 적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스에 깨알같이 적힌 안내 글씨들을 어깨 너머로 읽다가, 잘 모르겠어도 차례가 되면 적당히 티켓을 끊고 줄을 후다닥 벗어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그래서 우리에겐 키오스크와 사람이 구별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런 걸 세대 간 디지털 정보 격차로 설명하길 좋아하는 것 같다. 젊은 내가 키오스크를 쓸 줄 아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노인이 키오스크를 쓰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그러므로 노인이 키오스크에 적응하도록 젊은 사람이 도우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엔 무언가 비었다. 우선은 기업의 무분별한 인건비 절감과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소비주의 문제가 다뤄져야 하고, 이런 논의 위에서 사람이 있어도 뭘 물어보지 못하는 쪽의 문제도 함께 조명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모두가 프랜차이즈를 편안해하고 소위 ‘골목 상권’이 무너지는 현상은 이와 무관할까?
할머니 유튜버 밀라논나는 ‘꼬시래기’라는 해초가 뭔지 몰라도 시장에서 물어서 사고, 해 먹는다. 나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대신, 그녀가 녹화해 준 영상을 보고 배운다. 사람에게 물어보려 하면 늘 말문이 막혔다. 비싼 걸 권하지 않을까? 돈이 없다고 무시하지 않을까? 속이지 않을까? 이런 물음표들이 마음속을 떠다녔다. 내게는 누구나 적절한 물건을 정직한 설명을 듣고 각자의 상황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다는 신뢰가 없었고, 이 사회엔 그 신뢰를 만들 만한 기반이 부재한 듯하다. 사회 구조의 문제는 늘 더 취약한 쪽을 파고들어 치명상을 입힌다.
왜 우리는 기계 앞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되었을까? 사소한 고립의 순간들은 우리의 삶을 어디로 데려갈까? 크고 작은 격차들이 우리의 연결을 끊어내고 있다. 이 문제는 보다 다각도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