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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외출

opinionX 2022. 2. 28. 10:37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허향숙(1965~)

구전가요 ‘시집살이’에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란 가사가 나온다. 시집을 가면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3년은 견디라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집살이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시부모와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올라오는 화를 누르고 살자니 병이 안 날 수가 없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험한 말들을 삼키고 외출을 시도한다. 집 안에 걸어둔 거미줄은 생기를 잃은 집을, 물만 줘도 쑥쑥 자라는 콩나물은 아내의 발언권을 상징한다.

기껏 찾아간 곳이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다. 서울 은평뉴타운에 있는 낮은 산이다. 창밖 “한 그루 나무”를 보고 “인체 혈관 3D 사진”을 떠올림은 몸이 아프다는 것과 핏줄을 잇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빈 둥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품는 심리적 현상이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자각이다. 시부모와 남편 때문에 외출했는데,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간다. 가족에 대한 서운함과 허전함을 나 혼자만의 시간으로 푼다. 외출하기 좋을 계절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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