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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식했다. 아파트에서 공중에 뜬 상태로 사는 형편이다. 더부룩한 배를 부여잡고 사각의 모니터 앞에서 명절의 쓸쓸함을 달래는데 이런 뉴스들이 뜬다. 복도에 택배물이 쌓이고 부딪치면서, 옆집 문으로 밀려서 잘못 배달되기도 한단다.
어떤 이는 무심코 가지고 갔다가 주소가 1002호가 아닌 102호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삐끗하면 점유이탈물횡령죄가 될 수 있다는 변호사의 조언이다.
각박했다. 폭우로 침수된 반지하의 어느 세입자에게 집주인이 재난지원금의 반을 나눠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할머니가 택시에서 외국어 아파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기사양반 니미XX 아파트로 가주시오” 했더니, 찰떡같이 알아듣고 ‘호반리젠시빌 아파트’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시가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사연들을 보다가 도시에 관한 몇 가지 궁리가 떠올랐다. 영화 <화양연화>는 두 주인공이 복닥복닥 좁은 아파트로 하필이면 같은 날에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삿짐이 뒤섞이고 잘못 들어온 책 한 권을 옆집에 전해주면서 둘은 처음으로 말을 섞는다. 이후 다닥다닥 밀집된 홍콩을 무대로 둘의 어긋난 사랑도 전개된다. <총,균,쇠>는 인류 문명의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하는 책이다. 세 가지 열쇳말 중에서 ‘균’은 전염병을 창궐케 하여 원주민들을 몰살시킨 주범인데, 인간들을 집단으로 모여 살게 한 ‘도시화’를 그 배후로 지목한다. 도시라는 이 익명의 공간은 너무 가까워서 낯설고 너무나 비슷해서 고독하다.
추석 연휴의 첫날, 국악에 푹 빠진 친구와 달맞이 하러 인왕산에 올랐다. 김월하의 <월정명> 가락에 마음을 섞으며 한참을 기다리니 대추만 해진 해가 넘어가고 굵은 알밤만 한 달이 아차산 너머에서 떠올랐다. 휘황한 불빛에 휩싸인 서울. 눈 감는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또한 있다고 만능은 아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소설>은 연휴에 준비한 독서목록 중의 하나였다. “그는 도시의 밤 소음 가운데 인간의 숭고한 발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엄숙하게 귀를 기울였다. (…) 그래도 한번 들어봐. 도시의 발소리는 질병이야.” 도시와 관련된 이런 문장들을 떠올리며 위험한 특별시로 절뚝절뚝 내려왔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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