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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한 글자로 하나의 독립정부다. 일사불란하게 여러 의미를 거느린다. 맥락에 따라 그 뜻을 잘 골라 써야 한다. 한 글자가 더러 전혀 상반되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가령 다소 복잡한 글자인 亂(란)만 해도 ‘어지럽다’는 뜻은 물론 그 어지러움을 ‘다스린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열치열처럼 어지러움은 어지러움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일까. 우리말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으니 바보가 그런 경우라 하겠다. 바보는 우리가 늘 쉽게 아는 그러한 바보만의 바보는 아니다. 바보는 당신이 쉽게 여기는 말의 표면에 머무는 만만한 바보가 아닌 것이다.
가리왕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꽃동무들과 귀한 꽃을 찾겠다고 흩어졌는데 검불 여러 개를 이마에 붙인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꽃동무가 덤불에서 뛰어나왔다. 그러면서 전하는 말씀. 골짜기 입구의 조금 너른 평전에 갔더니 노랑턱멧새 한 마리가 바보처럼 굴더라는 것이다. 잠깐의 인기척에도 훌쩍 날아가던 새가 다리라도 부러진 듯 질질 끄는 시늉을 하며, 한쪽 날개를 다치기라도 한 듯 축 늘어뜨리고, 저쪽으로 나아가면서 잘하면 잡혀주기라도 할 것처럼, 힐끔힐끔 뒤돌아보더라는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새, 하려다가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근처에는 분명 새의 새끼 여러 마리가 평화롭게 놀고 있겠구나. 이 숲에서 침입자인 우리 일행이 말하자면 이물질에 불과한 위험한 물체라는 것. 그러니 둥지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어설픈 바보 연기를 하면서 유인하고 있었던 것. 아아, 바보같이 바보 흉내를 내는 바보 노랑턱멧새. 이를 흔치 않은 기회라 여기고 당장 그곳으로 뛰어들고 싶은 호기심이 일순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정말 그랬더라면 나는 얼마나 바보인 놈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인가.
어지러웠던 청말의 서예가 정판교(鄭板橋)는 세상의 통찰력을 발휘하면서 難得糊塗(난득호도)란 말을 남겼다. 총명하기도 어렵지만 바보처럼 보이기는 더욱 어렵다는 함의가 담긴 말이다. 둘러보면 우리 사는 세상에는 이마가 반질반질하고 혓바닥이 뺀질뺀질한 이들이 있다. 되돌아볼 줄 모르고 화면에서 활개치는 헛것들도 많다. 인생도처유상수라는 말이 있다. 세상도처유바보, 슬쩍 비틀어도 그리 바보 같은 말은 아닐 것 같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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