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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수습기자 논술시험 답지를 채점했다. 누가 썼는지는 가려진 글이다. 십중팔구는 선택 문항 중에 ‘공정’ 논제를 골랐다. 평창 올림픽 남북단일팀, 조국 일가의 아빠·엄마 찬스, 윤미향과 LH 특혜…. 여러 논술 소재가 등장했지만, 압도적인 예시는 ‘인국공’이었다. 1년 전 인천공항 보안검색요원 정규직 전환이 일으킨 갑론을박은 여전했다. 그때도 취업준비생은 ‘공채 숫자가 영향 받을지’ 따지고, 공항 정규직은 ‘직고용’을 막고, 비정규직은 ‘희망사다리를 끊지 말라’고 맞선 논쟁적 사안이었다. 한 답지가 흥미로웠다. 공정(公正)과 공평(公平)을 떼서 보자고 했다. 제한된 경쟁 플랫폼 위에 올라선 사람들은 ‘공정의 잣대’로, 그 플랫폼 밖에 사는 대다수 청년들은 ‘공평의 눈’으로 살피자고 했다. 쉽잖겠지만 세상은 그렇다면서….
청년은 ‘숫자 7’로 다가왔었다. 5년 전 경향신문이 ‘부들부들 청년’ 기획을 할 때, 목소리 큰 인서울 4년제 대학생은 동년배의 7.17%에 불과했다. 그 숫자는 2018년 12%, 지금 16%로 늘었다. 학령인구와 타 지역 대학생이 줄어 인서울 비율이 더 커졌을 수 있다. 다음해 서울연구원이 조사한 18~29세 서울 청년의 정규직 비율도 7%였다. 청년 고용률은 지금도 43%, 넷 중 셋은 살아서 계층 이동이 어렵다고 본다.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고, 인생의 봄바람을 찬미하며, 착목(着目)도 원대할 청년은 옛 교과서 속 <청춘예찬>일 뿐이다.
정치도 앞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힘 30대 당권주자 이준석이 던진 ‘여성·청년 공천할당제 폐기’ 공약이 그렇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여성장관 30%’ 구호를 문제시했다. 유력 당권주자로 선 지금은 정치를 확장시켜온 세대·성 할당제도 없애겠단다. ‘토론 배틀’도 좋고, 남녀노소 완전 경쟁을 붙이자는 것이다. 청년이 약자면, 여성은 그중에서도 아래다. 정규직 속의 여성은 아직도 24%뿐, 단순노무직(65%)과 서비스판매직(31%)이 두 축이다. 잉여 일자리를 헤매는 청년·여성에게 정치 문턱이 낮을 리 없다. ‘이대남 대변자’를 자처한 이준석은 적극 지지자를 얻고 역풍도 보일 것이다. 세상사가 변증법(정·반·합)으로 간다는 헤겔이 맞다.
또 한번, 공정은 대선으로 옮아탄다. 지지 포럼도 이재명은 ‘성장과 공정’,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 이낙연은 ‘연대와 공생(共生)’이다. 저마다의 색깔로, 시대정신으로 잡은 ‘공(公·共)’자가 승부처가 된 것이다. 윤석열이 온 길은 박근혜 국정농단과 조국 수사에 들이민 ‘처벌의 공정’이다. 반문 에너지는 추·윤 갈등에서 잉태됐다. 하나, 보수의 희망이 된 그의 공정은 거기에 서 있다. 대선 벼락공부는 세 달째 관심사만 짐작하게 할 뿐, 알려진 말은 단편적이다. 대선에 등장한 ‘윤석열과 콘텐츠’는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세대·노사·남녀·예산이 부딪치는 세상 해법에서 그의 공정은 다시 판가름된다.
이재명의 공정은 공평과 자주 겹친다. 그는 ‘공평 과세, 공정 세상’을 선창하면서 “법인 양도소득세만 비용을 빼주고 자산소득만 관대하다”고 짚었다. ‘기본 시리즈’의 출발선도 공평이다. ‘대학 미진학자 세계여행비 1000만원 지원’ 아이디어가 논쟁을 낳자, 그는 장학금 등에 수천만원씩 투입되는 대학생과의 지원 격차를 줄여 고졸 청년이 여행이든 자격증이든 주거비든 선택하게 하자고 부연했다. 모든 신생아에게 적금 들어 20세 될 때 1억원씩 주자는 정세균의 ‘미래씨앗통장’, 군 전역자에게 3000만원씩 주자는 이낙연의 ‘사회출발자금’에도 공평이 깃들어 있다. 야당에선 “포퓰리즘” 공격과 “월 50만원씩 청년 기본소득을 주자”(김웅)는 말이 교차한다. 공정의 착점이 제각각이다.
여당 대표에게 청년이 “돈 준다고 속지 않는다”고 했다. 맞고, 논점을 넓혀야 한다. 한국의 빈곤은 20대와 노인이 높은 ‘쌍봉형’이다. 최소한의 현금과 주택 모기지로 안전망을 짜고, 일자리를 옥죄는 연공급제도 보완할 때가 됐다. 복지·임금의 뺄셈은 1차 선택지가 아니다. 경제 덩치와 65%인 노동소득분배율을 키우고, 그 파이를 청년 일자리와 정년 연장에 부어야 한다. 깨지 않으면 세울 수 없는 불파불립(不破不立)의 시간이 됐다.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 노무현의 대선 출정사가 나온 지 20년이 흘렀다. 그때 끄덕였지만 반성할 것투성이고, 생각할수록 붕 떠왔다. 내로남불이 설 데 없고, 콩 한 쪽도 제대로 나누는 세상을 다시 꿈꿔야 한다. 국가가 할 일이다. 그 대타협의 리더십이 설 수 있을까. 정치가 할 일이다. 진짜 공정한 게 뭔지, 그게 가능한 나라인지 묻는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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